준강간 피해 후 '증거불충분'… 법조계 “포기하긴 이르다, 이 증거가 핵심”
준강간 피해 후 '증거불충분'… 법조계 “포기하긴 이르다, 이 증거가 핵심”
믿었던 선배에게 성폭력 당한 후 HPV 감염·PTSD 진단… 경찰 불송치에 법률 전문가들 “불송치 이유서 분석 후 추가 증거로 이의신청해야”

여성이 준강간 피해를 주장했으나 경찰은 '증거불충분'으로 불송치했다. /챗 지피티 생성 이미지
믿었던 선배의 배신, 몸과 마음의 상처만 남았는데… 경찰은 '증거 불충분'이라 했다.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건넨 술잔, 그리고 이어진 악몽 같은 밤. 준강간 피해를 주장하는 여성은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경찰로부터 '증거불충분' 불송치 통보를 받았다.
법의 문턱에서 좌절한 피해자에게 법률 전문가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반격을 위한 구체적인 조언을 건넸다.
“나도 남잔데...” 한밤중 선배의 돌변
사건은 운동을 마친 후 선배 A가 피해자의 숙소까지 데려다주면서 시작됐다. A는 “할 얘기가 있다”며 술을 사서 들어갔고, 진지한 대화가 오갔다.
그러나 A가 차에서 가져온 양주를 마시기 시작하며 분위기는 급변했다. A는 “심장이 빨리 뛴다”며 피해자의 침대에 누웠고, 샤워를 마치고 나온 피해자는 그를 피해 침대 한쪽에 조심스럽게 누웠다. 그때부터 A는 피해자의 몸을 쓰다듬으며 추행을 시작했다.
피해자가 손을 잡으며 저지하자 A는 “이러면 안 되겠지? 내가 후회하겠지?”라고 물었고, 피해자는 “네”라고 단호하게 답한 뒤 잠이 들었다. 하지만 몇 시간 후, 잠든 피해자 옆에서 A는 “나도 남잔데...”라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피해자 위로 올라타 성폭행을 저질렀다.
A는 “아까부터 계속 하고 싶었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잠들었고, 피해자는 충격 속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일주일의 '연인 관계', 1년 뒤 날아온 '불송치' 통보
사건 직후는 피해자에게 혼란의 연속이었다. 중요한 진급 심사 기간이었고, 가해자 A는 마치 마음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피해자는 '그저 실수였을까' 하는 생각에 신고를 망설였고, 일주일간 연인처럼 지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1년의 시간이 흐른 뒤 A는 연락을 끊었고, 피해자는 HPV 고위험군 및 자궁경부이형성증, 공황장애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A가 평소 유흥업소 등을 즐겨 찾았고, 부대 내에 또 다른 성추행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서 고소를 결심했다.
하지만 경찰은 A가 사과하는 내용의 카카오톡 대화와 산부인과 기록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증거불충분'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사건 후 교제, 가장 큰 쟁점”... 전문가들의 냉철한 진단
법률 전문가들은 사건 직후 일주일간 연인 관계처럼 지낸 점이 혐의 입증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법무법인 선승의 안영림 검사 출신 변호사는 “곧바로 신고하지 않고, 이후 연인관계로 지낸 점 등이 혐의 입증에 불리하게 작용하였다면 이의신청하더라도 쉽지 않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가해자 측에서 '합의된 관계'였다고 주장할 핵심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경찰이 불송치 결정을 내린 주된 이유였을 가능성이 크다.
“뒤집을 카드는 있다”... 변호사들이 지목한 '결정적 증거'
하지만 뒤집을 카드는 남아있다. 변호사들은 피해자가 아직 제출하지 않은 증거들이 판을 바꿀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더신사 법무법인의 남희수 군검사 출신 변호사는 “정신과 진료 기록(공황장애 및 PTSD 진단서), 성고충 상담 내역” 등을 추가 증거로 제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법률사무소 빈센트의 남언호 변호사 역시 “연인관계 유지도 A의 심리적 조작에 의한 것이며, 진급 등 현실적 이유로 신고를 하지 못했던 정황을 소명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특히 “부대 내 추가 피해자가 협조할 경우, 증인 진술을 확보해 A의 행위가 반복적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 결정적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항거불능' 상태였나… 법의 눈으로 본 그날 밤
이 사건의 핵심 법리는 형법 제299조의 '준강간죄' 성립 여부다. 준강간죄는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해 간음했을 때 적용된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술에 취해 정상적인 판단능력과 대응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였다면 항거불능 상태에 해당할 수 있다. 피해자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이전에 명확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는 점은 항거불능 상태였음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정황이다.
“포기하지 마라”... 끝나지 않은 싸움의 첫걸음
전문가들은 이의신청이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첫 단계는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경찰의 '불송치 이유서'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유서에 담긴 경찰의 논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반박하는 것이 핵심이다.
서아람 검사 출신 변호사는 “경찰과 검찰의 의견이 가장 많이 갈리는 사건이 바로 성범죄”라며 “경찰이 법리 적용을 잘못했거나 수사가 미진했던 부분을 제대로 지적해야 이의신청이 받아들여진다”고 설명했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는 좌절감 속에서도, 피해자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