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피해자 ‘기억 공백’, 오히려 유죄의 핵심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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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피해자 ‘기억 공백’, 오히려 유죄의 핵심 증거였다

2025. 10. 23 09:37 작성2025. 10. 23 09:37 수정
조연지 기자의 썸네일 이미지
yj.jo@lawt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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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안 나도 유죄?” 술 취한 성폭행, 법원 판결 뒤집었다

“필름 끊겼어도 처벌된다” 법원이 밝힌 충격 판결 이유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사이 당한 성폭행. 가해자를 처벌할 결정적 증거는 역설적으로 피해자의 '흐릿한 기억'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신고조차 망설이는 피해자들에게, 법원은 상식과 다른 답을 내놓고 있다.


의식 있었어도 저항 못 했다면…'항거불능'의 재해석

성범죄 상담 현장에서 가장 흔한 호소는 "술에 취해 저항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많은 피해자가 기억의 공백 때문에 자신의 주장이 힘을 잃을까 두려워하지만, 우리 법원은 이런 상태를 '항거불능(스스로의 힘으로 저항할 수 없는 상태)'으로 보고 가해자를 처벌할 길을 열어두고 있다.


핵심은 피해자가 의식을 완전히 잃었는지 여부가 아니다. 대법원은 이미 "피해자가 술이나 약물에 취해 저항이 현저히 곤란한 상태였다면, 설령 의식을 완전히 잃지 않았더라도 항거불능 상태로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대법원 2005도9422 판결).


가해자의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더라도, 피해자의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해 성관계를 했다면 준강간죄가 성립한다.


성범죄 전문 A 변호사는 "재판부는 피해자가 마신 술의 양, 범행 전후의 행동, 주변인 진술 등 객관적 정황을 종합해 '저항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합리적 판단을 내린다"며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항거불능 상태를 뒷받침하는 유력한 정황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조각난 기억 vs 일관된 진술, 법원은 무엇을 믿나

준강간 사건처럼 피해자의 진술이 유일한 직접 증거일 때, 드문드문한 기억에 기반한 진술의 신빙성(믿을 수 있는 정도)은 어떻게 판단될까.


법무법인 Y의 B 변호사는 "법원은 기억의 완벽성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오히려 수사 초기부터 법정까지 이어지는 진술의 '핵심적 일관성'에 주목한다"면서 "충격적 사건 후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기억이 파편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재판부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사건 직후 친구에게 털어놓은 피해 사실, 경찰 첫 조사 때의 진술, 법정 증언이 큰 틀에서 어긋나지 않는지가 중요하다. "범행 장면이 영화처럼 생생하게 기억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당신의 '기억 없음'이 무기가 되려면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진술이 언제나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수사기관이나 법정에서 어떻게 진술하고, 어떤 증거로 기억의 공백을 메우느냐에 따라 결과는 180도 달라질 수 있다.


서초동의 C 변호사는 "변호사는 의뢰인의 파편화된 기억 조각을 모아 법률적으로 의미 있는 그림을 재구성하는 조력자"라고 말했다.


그는 "사건 전후의 CCTV, 메신저 대화, 카드 사용 내역 등 객관적 정황 증거를 신속히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일관성 있는 진술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인생을 뒤흔드는 성범죄 피해 앞에서 불완전한 기억은 결코 포기의 이유가 될 수 없다. 당신의 흐릿한 기억 뒤에는 '항거불능'이라는 법의 눈이, 그리고 당신의 고통에 귀 기울일 법정이 기다리고 있다.


주저하지 말고 법률 전문가의 문을 두드리는 것, 그것이 진실을 향한 가장 용기 있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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