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성추행 '불입건' 결정…피해자 진술만으로 재수사 가능할까
버스 성추행 '불입건' 결정…피해자 진술만으로 재수사 가능할까
법률 전문가들 "경찰 결정 끝 아냐…이의신청으로 검찰 판단 받아야"

A씨가 버스에서 잠들었다가 옆자리에 앉은 남성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제미나이 생성 이미지
"CCTV에 안 찍혔다고 없던 일이 되나요?" 버스에서 잠들다 당한 성추행, 경찰은 '증거 불충분'
"분명히 당했는데, CCTV에 허벅지가 안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없던 일이 될 수는 없잖아요."
버스에서 잠들었다가 옆자리 남성에게 성추행을 당한 A씨는 억울함을 토로했다. 당일 신고 후 CCTV까지 확보됐지만, 경찰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사건을 입건조차 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는 범죄'를 외면한 수사기관의 결정에 법적 구제 절차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A씨의 평범했던 하루는 악몽으로 변했다. 버스에 앉아 잠시 눈을 붙인 사이, 옆자리에 앉은 남성이 자신의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깬 A씨는 곧바로 이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은 버스 내부 CCTV 영상을 확보했고, A씨는 경찰서에서 피해 사실을 상세히 진술했다. 가해자가 처벌받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하지만 며칠 뒤 A씨가 받은 것은 '불입건 결정 통지서(범죄 혐의가 없다고 판단해 정식 수사 전 사건을 종결하는 처분)'였다.
경찰은 "CCTV 영상이 좌석에 가려져 허벅지 아랫부분이 명확히 보이지 않아 혐의를 입증하기 애매하다"고 설명했다. A씨는 "성추행을 당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신고와 진술이라는 증거도 있는데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억울하다"며 재수사를 요청할 방법을 찾고 있다.
"CCTV가 전부는 아니다"...피해자 진술, 결정적 증거 될 수 있나?
A씨의 사연에 법률 전문가들은 "경찰의 결정이 끝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특히 성범죄 사건의 경우, 직접적인 영상이나 물증이 없는 경우가 많아 피해자의 진술이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홍대범 변호사는 "성범죄 사건은 피해자의 진술만으로도 죄가 인정될 수 있다"며 "CCTV 영상까지 있다면 이의신청으로 결과가 바뀔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정재영 변호사 역시 "피해자가 즉시 신고했고, 진술에 일관성이 있다면 그 자체로 신빙성을 확보한 중요한 보강증거가 된다"고 조언했다. 범행 직후의 즉각적인 대응이 피해자 진술의 신뢰도를 높인다는 의미다.
경찰이 덮은 사건, 되살릴 '불복 절차'는?
그렇다면 A씨는 어떤 절차를 통해 재수사를 요청할 수 있을까. 변호사들은 경찰의 '불입건' 또는 '불송치(수사 후 사건을 검찰에 넘기지 않는 결정)'에 불복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가장 첫 단계는 '이의신청'이다. 서아람 변호사는 "경찰의 불송치 결정서를 받은 날로부터 30일 이내에 관할 검찰청에 이의신청을 할 수 있다"며 "검찰은 이를 근거로 직접 재수사를 하거나 경찰에 보완수사를 지휘할 수 있다"고 밝혔다. 경찰의 1차 판단을 검찰이 다시 한번 심사하도록 강제하는 절차인 셈이다.
만약 검찰마저 불기소 처분을 내린다면 '항고(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불복해 상급 검찰청에 다시 판단을 구하는 절차)'와 '재정신청(법원에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 타당한지 판단해달라고 요청하는 절차)'이라는 다음 단계가 있다.
정재영 변호사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 확정될 경우, 법원에 재정신청을 제기해 '다시 기소 여부를 판단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 단계는 법리적으로 까다로워 전문가의 조력이 필수적이다.
"잠든 사이 스친 손길"...영상 속 숨은 증거 찾을 수 있을까
'애매하다'는 CCTV 영상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다. 법률사무소 새율의 윤준기 변호사는 "비록 CCTV가 허벅지 아래를 비추지 못하더라도, 가해자의 행동 패턴이나 손의 움직임, 피해자의 반응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충분히 성추행 행위를 입증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추가 증거 확보 노력도 중요하다. 법률사무소 온경의 추민경 변호사는 "당일 작성한 진술서, 즉시 신고한 정황 외에 당시 주변인 진술, 피해 직후 심리상태나 의료기록 등 간접증거들을 함께 제출하면 재수사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억울함만 호소하기보다, 수사기관이 놓친 부분을 지적하고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는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A씨의 사례처럼 명백한 피해 사실에도 불구하고 '증거 불충분'이라는 벽에 부딪히는 경우는 적지 않다. 하지만 경찰의 첫 판단이 사법적 정의의 끝은 아니다.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은 그 자체로 강력한 무기이며, 이의신청과 항고 등 불복 절차는 닫힌 수사의 문을 다시 열 수 있는 열쇠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진 범죄일수록, 포기하지 않고 법이 보장한 권리를 끝까지 행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