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번 상향등 번쩍였는데…'보복운전' 블랙박스, 왜 증거가 안 됐나
300번 상향등 번쩍였는데…'보복운전' 블랙박스, 왜 증거가 안 됐나
블랙박스 영상만으론 부족…법원, '단순 불만'과 '법적 위협' 경계 엄격히 판단. 피해자, 고의성·공포 직접 증명해야 하는 험난한 싸움 남아.

A씨가 상대방 앞으로 끼어들었다는 이유로 10분간 300회 넘게 상향등 세례를 받아 고소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됐다. 이유가 무엇일까?/셔터스톡씨.
15km 추격, 300회 상향등 세례에도 '증거불충분'…블랙박스 속 '공포의 무게'를 피해자가 직접 증명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짚어본다.
"상대방 앞을 끼어들었다는 이유로 10분간 300회 넘게 상향등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소한 시비는 순식간에 악몽으로 변했다. 뒤따라온 차량은 약 15km의 거리를 집요하게 따라오며 5분에서 10분에 걸쳐 300회 이상 상향등을 번쩍였다. 눈을 멀게 할 듯한 불빛 세례에 A씨는 극심한 공포와 위협을 느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가해 차량의 행위를 명백한 '보복운전'으로 판단해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 A씨는 당연히 가해자가 처벌받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검찰의 판단은 달랐다. 돌아온 것은 '증거불충분'으로 인한 불기소 처분 통보였다. 블랙박스 영상이라는 명백한 증거에도 법의 문턱은 높았다.
블랙박스 영상이라는 '스모킹 건'이 있는데도 왜 이런 결과가 나왔지?
법률 전문가들은 영상의 존재만으로 유죄가 입증되는 것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핵심은 상향등 점멸 행위가 법적으로 처벌 가능한 '협박'의 구성요건을 충족하는지 여부다.
한병철 변호사는 "'증거불충분'은 혐의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법정에서 유죄를 받아낼 만큼 증명이 부족하다는 뜻"이라며 "단순 상향등 점멸만으로 피해자가 현실적 공포심을 느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검찰이 판단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해자의 행위가 불쾌함을 넘어, A씨의 생명이나 신체에 실질적인 위험을 초래했다는 점이 명확히 증명돼야 한다는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나?
가해자는 변호사를 선임했지만, A씨는 홀로 싸워야 했다. 이 '기울어진 운동장'이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재영 변호사는 "피의자 측이 변호사를 통해 '협박 의도가 없었고 순간적인 불만 표출이었다'고 법리적으로 주장하면 고의성 판단이 애매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경찰 교통사고조사팀장 출신인 최성현 변호사 역시 "변호사는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에게 유리한 반박 자료를 내거나 영상의 증거능력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며 "현실적으로 법리 주장 수준과 증거 제출 방식의 차이가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억울한 A씨는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전문가들은 아직 방법이 남았다고 조언한다. 우선 검찰청에서 '불기소이유서'를 발급받아 검찰이 왜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파악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이후 처분에 불복한다면 검찰 상급청에 이의를 제기하는 '항고'나, 법원에 직접 기소 여부를 판단해달라고 요청하는 '재정신청' 절차를 밟을 수 있다. 형사 처벌과 별개로 정신적 피해에 대한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길도 열려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는 단순히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반복적인 상향등 점멸이 운전 중 어떻게 생명과 신체의 위협으로 이어졌고, 극심한 공포를 유발했는지 구체적으로 주장하고 이를 뒷받침할 보강 증거를 제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A씨의 블랙박스에 담긴 300번의 불빛은 명백한 폭력이었지만, 그 행위가 법의 심판대에 오르기까지는 '단순 불쾌감'과 '법적 위협'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어야 한다. 결국 A씨는 자신의 영상 속 불빛이 남긴 '공포의 무게'를 법정에서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험난한 과제를 안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