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의 ‘친절한’ 제안, 가해자 전역하면 징계는 ‘물거품’
軍의 ‘친절한’ 제안, 가해자 전역하면 징계는 ‘물거품’
"수사 결과 기다리자"는 말 믿었다간…징계 기회 영영 놓칠 수도

군내 가혹행위 피해자가 가해자의 형사처벌과 징계를 모두 원하자, 군 당국은 '절차 효율'을 내세워 징계 중단을 권유했다. / AI 생성 이미지
군내 가혹행위 피해 병사가 가해자의 형사처벌과 군 징계를 모두 원하자, 군 당국이 '절차상 효율'을 내세워 징계 중단을 권유했다.
하지만 법률 전문가들은 '가해자가 전역하면 군 징계가 불가능해지는 치명적 함정이 있다'며, 실무 편의를 위한 제안이 피해자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고 강력히 경고하고 나섰다. 가해자에게 합당한 책임을 묻기 위한 두 개의 절차가 오히려 피해자의 발목을 잡는 덫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진술 꼬일라"…피해자 위한다는 군의 '배려'
군내 폭행 및 성추행 피해를 입은 한 병사는 가해 병사에 대한 군 내부 징계와 형사처벌을 동시에 원했다. 그러나 군 법무 담당자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는 "형사 사건화 된 경우에는 형사 결과에 따라서 사실 징계를 주게 되어 있다"며 "별도로 조사를 하더라도 이게 바로 징계까지 이어지지가 않아요"라고 설명했다. 징계 절차를 잠시 멈추자는 것이다.
그 근거로 '피해자 보호'를 들었다. 담당자는 "제가 조사했을 때랑 경찰에서 조사했을 때 이게 안 맞으면 또 이게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여러 기관에서 조사를 받다가 진술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오히려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수사기관의 결과가 아마 전역 전에는 나올 것 같거든요"라며, 그때 가서 징계를 해도 늦지 않는다는 취지로 조사 중단을 제안했다. 겉보기엔 피해자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합리적인 배려처럼 들린다.
"전역하면 끝"…법조계, '치명적 위험' 한목소리 경고
하지만 법률 전문가들은 이 제안에 '치명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바로 가해자의 '전역' 문제다.
법무법인 홍림의 김남오 변호사는 "수사 결과가 전역 이후에 나올 경우, 군징계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해지며, 형사처벌만 가능합니다"라고 단언했다. 군 법무관의 "전역 전에 결과가 나올 것 같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확정이 아닌 '추정'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법무법인 대한중앙의 이동규 변호사 역시 "징계 절차를 중지하면 가해자가 전역해 실질 제재가 약해질 위험도 있다"고 경고하며, "전역 전 징계를 원한다면 지금 단계에서 징계 절차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군 당국의 제안이 실무 편의를 위한 설명일 뿐, 피해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적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비판이다.
법은 '병행 가능', 훈령은 '적극 요구'…선택은 피해자의 몫
현행법상 군내 징계와 형사처벌은 완전히 별개의 절차다. '군인사법' 제59조의3은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징계 절차를 '진행하지 아니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는 징계권자의 재량 사항일 뿐, 수사 중 징계를 반드시 멈춰야 한다는 강제 규정이 아니다. 즉, 형사처벌과 징계 절차는 얼마든지 동시에 진행할 수 있다.
특히 '국방부 군인·군무원 징계업무처리 훈령'은 성폭력 사건의 경우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징계 의결을 요구해야 한다고 명시해, 오히려 중대 비위에 대한 적극적인 징계를 주문하고 있다.
결국 선택은 온전히 피해자의 몫이다. 법률사무소 유(唯)의 박성현 변호사는 "질문자님은 형사처벌과 군내 징계를 동시에 요구할 권리가 있고, 어느 하나를 중지하라는 요구에 따를 의무는 없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오히려 가해자의 전역 전 징계를 원한다면 지금 단계에서 징계 절차 유지를 명확히 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친절한' 제안 뒤에 숨은 위험을 인지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것은 결국 피해자 자신에게 달렸다는 점을 법률 전문가들은 분명히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