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약 후 알고 보니 '집주인이 치매'...내 보증금 괜찮을까?
전세계약 후 알고 보니 '집주인이 치매'...내 보증금 괜찮을까?
잔금일 앞두고 날벼락 맞은 세입자... 의사능력 없는 계약은 무효 가능성, 법률 전문가들이 제시한 해법은?

전세 계약 후 집주인이 치매임을 알게 된 경우, 계약 당시 집주인의 의사능력과 대리인의 적법한 대리권 유무가 계약 유효성의 관건이다./챗 지피티 생성 이미지
계약서에 도장 찍었는데... '집주인이 치매' 통보받은 세입자의 절규
빌라 전세 계약을 마치고 잔금일만 손꼽아 기다리던 A씨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대출 심사 과정에서 집주인이 치매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계약 당시 집주인의 딸이 동행했지만, 치매라는 말은 들은 적도 없었다. A씨의 머릿속은 '내 보증금은 안전한가'라는 물음표로 가득 찼다.
계약은 유효한가?...법률가들 "의사능력이 관건"
A씨의 가장 큰 걱정은 계약의 효력이다. 만약 집주인이 계약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 계약은 없던 일이 될 수 있을까.
법률 전문가들은 '치매'라는 진단명 자체보다 계약 당시 집주인의 '의사능력'이 있었는지가 핵심이라고 입을 모은다. 의사능력이란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의미와 결과를 낳는지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말한다.
황미옥 변호사(법률사무소 HY)는 "의사능력이 없는 자는 계약을 체결할 유효한 의사를 결정할 수 없다고 본다"며 계약이 무효가 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즉, 계약 당시 집주인이 전세계약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상태였다면 계약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반면 법원은 치매를 앓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의사능력이 없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법원은 "의사능력의 유무는 구체적인 법률행위와 관련하여 개별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의정부지방법원 2022나44 판결)는 입장이어서, 계약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딸이 대신했는데'...적법한 대리권이 열쇠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계약 당시 동석했던 '딸'의 존재다. A씨는 딸이 계약을 도왔다고 기억했다. 그렇다면 딸의 행위가 계약의 효력을 보증해 줄 수 있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딸에게 '적법한 대리권'이 있었는지 여부다.
김경태 변호사(김경태 법률사무소)는 "계약 당시 딸이 임대인을 대리하여 참석했다면, 등기부등본상 임대인의 성년후견인이나 한정후견인으로 등록되어 있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성년후견인은 질병, 노령 등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 처리 능력이 부족한 성인을 대신해 법률행위를 할 수 있도록 법원이 지정한 대리인이다. 만약 딸이 법적 후견인이라면 계약은 유효하다.
하지만 단순히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대리권이 인정되지는 않는다. 황미옥 변호사 역시 "과거로부터 임대인으로부터 적법한 대리권을 수여받은 사람이 있는지를 판단하고 그로부터 동의를 확인해 둠이 타당하다"고 강조했다. A씨 입장에서는 딸의 법적 지위를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가 된 셈이다.
내 보증금 지키려면...'이것'만은 꼭 챙겨라
그렇다면 A씨는 남은 잔금일 한 달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계약을 유지할 경우와 파기할 경우를 나눠 대응 전략을 제시했다.
계약을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증거 확보가 최우선이다. 김경태 변호사는 "딸의 신분증 사본과 가족관계증명서를 확보해두는 것이 좋다"고 조언하고, "반드시 임대인과 딸이 모두 참석한 상태에서 진행하고, 영수증을 발급받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한 계약 내용과 잔금 지급 과정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기록해두는 것도 분쟁 예방을 위한 좋은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계약의 불확실성을 안고 가기 어렵다면, 계약 취소도 선택지가 될 수 있다. 김명수 변호사(법무법인 인화)는 임대인의 의사무능력을 근거로 임대차계약을 취소하고 계약금 반환을 요구하는 방안을 고려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 경우 "법적 절차로 진행하지 않으려면 임대인의 딸과 중개사를 잘 설득해보는 과정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임차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필수다. 잔금 지급과 동시에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를 받아 주택임대차보호법상 대항력을 확보하거나, 가능하다면 임대인 측의 협조를 얻어 임차권보다 강력한 물권인 전세권설정등기를 마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A씨와 같은 사례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계약 전 임대인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법적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지혜가 필요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