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 파일만 믿었는데"…강간죄 몰린 남성의 절규
"녹음 파일만 믿었는데"…강간죄 몰린 남성의 절규
합의 관계라 확신했지만…'결정적 증거', 변호사들이 제출 만류한 이유

데이팅 앱 만남 후 강간 혐의로 고소된 남성이 녹취 파일로 무죄를 자신했으나, 법률 전문가들은 증거 편집의 위험성을 들어 변호사와 함께 신중히 대응할 것을 권했다. /
데이팅 앱으로 만나 합의 하에 성관계를 맺은 후 강간 혐의로 고소당한 남성. 그는 "강압이 없었다는 녹음 파일이 있다"며 무고함을 자신했지만, 법률 전문가들은 "혼자 경찰서에 가지 말라", "녹음 파일을 끊어 제출하면 독이 될 수 있다"고 한목소리로 경고했다.
성범죄 혐의 앞에서 '확실한 증거'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변호사들의 조언을 통해 짚어본다.
"합의 관계 녹음했는데, 강간 고소라니요"
사건의 발단은 지난 12월 말, 한 남성이 데이팅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만난 여성과 모텔에서 성관계를 가지면서 시작됐다. 그는 모든 것이 합의하에 이뤄졌다고 믿었지만, 얼마 뒤 경찰로부터 "강간 혐의로 고소장이 접수됐다"는 청천벽력 같은 연락을 받았다.
남성은 당황했지만, 한편으로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사건 당일,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대화 내용을 녹음해 둔 것이다. 그는 이 녹음 파일에 합의하에 모텔로 이동했고, 강압적인 분위기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 증명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는 이 '확실한 증거'만 경찰에 제출하면 모든 오해가 풀릴 것이라 기대하며 변호사 없이 혼자 조사를 받아도 될지 법률 상담의 문을 두드렸다.
변호사들 만장일치 "혼자 갔다간 큰일…초기 진술이 운명 가른다"
남성의 기대와 달리, 변호사들의 답변은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경고'였다. 법무법인 선의 김우중 변호사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해도 변호사를 대동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단언했다.
전직 경찰서 수사과장 출신인 법무법인 태신의 성현상 변호사 역시 "성범죄의 경우 특히 수사 초기 진술이 매우 중요한 만큼 신중하게 대응하실 필요가 있습니다"라며 섣부른 단독 대응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전문가들이 이토록 변호사 동행을 강조하는 이유는 성범죄 수사의 특수성 때문이다. 법률사무소 무율의 김도현 변호사는 "변호사의 대동은 △내용 정리 △진술의 유불리 판단 △수사관의 강압수사 방지 △심리적 안정 △절차의 도움 등의 장점이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본인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한 진술이 수사관의 질문 의도나 법리적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조서에 남을 수 있고, 한번 뱉은 말은 되돌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유리한 부분만 싹둑?'…녹음 파일 편집 제출, 왜 독이 되나
남성의 두 번째 질문인 '녹음 파일 분할 제출'에 대해서도 변호사들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파노 법률사무소의 송동민 변호사는 "중간중간 끊어져 있다면 중간에 삭제된 내용이 있는지 의심을 살 수 있습니다"라며 "효력이야 다 있지만 신뢰가 덜 갈 수 있습니다.(증거능력의 문제라기 보다는 증명력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증거의 '증거능력(법정 증거로 채택될 자격)'이 아닌 '증명력(사실을 증명하는 힘)'의 문제라는 것이다.
서울종합법무법인 류제형 변호사도 "편집하지 않은 전체 녹음을 제출하여야 증거의 신빙성이 높아집니다"라고 조언했다. 유리한 부분만 잘라 제출할 경우, 수사기관이나 법원이 '불리한 내용을 의도적으로 숨겼다'는 의심을 품게 해 오히려 증거 전체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법무법인대한중앙 한병철 변호사는 "녹음파일은 속기사 사무소에 의뢰해 녹취록 형태로 변환한 후에, 그 녹취록 문서를 경찰에 제출하셔야 합니다"고 조언했다. 녹음파일은 원본과 함께 공식적인 녹취록을 제출하는 것이 정석이라는 얘기다.
"준강간이면 녹취도 무의미"…숨겨진 함정과 대응책
변호사들은 수동적 방어를 넘어 적극적인 법적 대응까지 조언했다. 많은 변호사들이 불송치 결정(경찰 단계에서 혐의가 없다고 판단해 사건을 검찰에 넘기지 않는 것)을 받은 후에는 상대방을 무고죄로 고소해 법적 책임을 묻고 변호사 비용 등 손해를 배상받는 절차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경고도 빠지지 않았다. 법무법인 공명의 김준성 변호사는 "녹음파일이 있어도 피해자가 술에 취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하면 방어가 어렵습니다. 사건명이 준강간으로 진행이 되면 녹음파일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라며, 피의자가 가진 증거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는 복잡한 변수가 존재함을 지적했다.
결국 전문가들의 조언은 한 가지로 모인다. 성범죄 혐의를 받는 순간, 스스로의 판단을 믿고 섣불리 행동하기보다 즉시 법률 전문가의 조력을 받아 첫 단추부터 제대로 꿰는 것이 억울한 처벌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