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지 않는 하룻밤 실수…전문가들 "'기억 안 난다'는 진술 위험
기억나지 않는 하룻밤 실수…전문가들 "'기억 안 난다'는 진술 위험
고의성 없었다는 점 일관되게 주장하고 합의 노력해야

술에 취해 친구와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다가 다른 승객을 다치게 한 A씨. 그가 고의성을 부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셔터스톡
음주 후 에스컬레이터 사고, '고의성' 입증 여부가 상해죄·과실치상 가른다
“한 달 전 술에 취해 저지른 실수,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상해죄 고소라니 눈앞이 캄캄합니다.” 평범한 직장인 A씨는 한 달 전 술에 취해 벌어진 에스컬레이터 사고로 하루아침에 형사 처벌 위기에 놓였다.
사건은 지난 7월 23일 저녁에 벌어졌다. A씨는 낮부터 이어진 음주로 당시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된 것은 사건 발생 한 달이 훌쩍 지난 8월 26일, 경찰로부터 ‘에스컬레이터에서 여성과 부딪친 사건으로 고소가 접수됐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였다.
A씨는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받아본 고소장을 읽고 충격에 빠졌다. 고소장에는 ‘A씨와 친구가 에스컬레이터 위쪽에서 강하게 밀치며 덮쳤고, 그 충격으로 목과 어깨에 상해를 입었다’고 적혀 있었다. 더욱이 A씨가 “웃으면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했고, 친구는 ‘제가 밀었어요’라며 얼버무렸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피해자는 신체적 충격은 물론, 공포감과 분노를 느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까지 받았다고 주장했다.
웃으며 한 사과, 고의 입증 증거 되나?
A씨가 가장 두려워하는 대목은 ‘웃으면서 사과했다’는 피해자의 진술이다. 의도치 않은 실수였다고 항변하고 싶지만, 이 진술 하나로 자칫 ‘고의성’이 인정돼 무거운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A씨의 행위에 ‘고의성’이 있었는지 여부다. 법무법인 인화의 최경섭 변호사는 “피해자 입장에서는 고의 여부를 파악하기 어려워 상해죄와 과실치상죄를 모두 고소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두 죄의 가장 큰 차이는 고의성이다. 법률사무소 장우의 이재성 변호사는 “상해죄는 상대방을 다치게 하려는 의도가 입증되어야 성립하는 반면, 과실치상죄는 부주의로 인해 상해를 입혔을 때 성립한다”고 설명했다.
만약 고의성이 인정되면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는 상해죄(형법 제257조)가, 고의성이 없었다면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그치는 과실치상죄(형법 제266조)가 적용될 수 있다.
더신사 법무법인의 김연주 변호사는 “‘웃으며 사과했다’는 정황은 ‘술에 취해 우스꽝스럽게 표현했을 뿐, 가볍게 넘기려 했던 것은 아니다’라는 맥락으로 설명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기억상실, 처벌 피할 수 있는 열쇠 될까?
A씨처럼 피의자가 당시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는 수사 과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무작정 “기억이 안 난다”고만 반복하면 반성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거나, 불리한 사실을 숨기려 한다는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문준홍 법률사무소'의 문준홍 변호사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고의성은 없었다’고 하는 것은 신빙성 없는 모순된 진술로 보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기억이 없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만능 열쇠’는 아니라는 의미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진술의 일관성을 강조한다. JY법률사무소 이재용 변호사는 “기억이 없는 부분을 억지로 꾸며내기보다 ‘음주로 정확히 기억은 없으나 고의로 밀치거나 해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점을 일관되게 진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기억나지 않는 부분은 솔직하게 인정하되, 상해를 가할 의도가 없었다는 점을 명확히 선을 그어야 한다는 얘기다.
상해죄 vs 과실치상죄, 운명 가를 '합의'
결국 A씨의 운명은 ‘합의’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과실치상죄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하면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反意思不罰罪)’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법률사무소 새율의 최성현 변호사는 “피해자와의 합의가 사건 해결의 가장 좋은 방법”이라며 “합의가 이뤄지면 과실치상죄는 처벌할 수 없게 되고, 상해죄 역시 고의성 입증이 어려워 기소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진다”고 강조했다. 피해자가 PTSD까지 주장하는 만큼,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치료비 보상 등 피해 회복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필수적이다.
법무법인 선승의 안영림 변호사는 “고소장 내용을 보니 쉽게 합의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면서도 합의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경찰 조사 단계부터 변호사의 조력을 받아 방어 전략을 세우고, 피해자와의 합의를 시도하는 것이 A씨가 처벌을 피하거나 최소화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길이다.
한순간의 부주의가 불러온 나비효과는 A씨에게 기억나지 않는 과거에 대한 값비싼 책임을 묻고 있다. 그의 사건은 음주로 인한 실수가 한 개인의 인생을 어떻게 뒤흔들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위기 속에서 진심 어린 사과와 책임감 있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씁쓸한 교훈을 남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