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은 관계 맞지만 강간은 아니다”…녹음파일도 소용없던 ‘부부 강간’의 벽
“원치 않은 관계 맞지만 강간은 아니다”…녹음파일도 소용없던 ‘부부 강간’의 벽
이혼 절차 중 전남편에게 성폭행당했다며 고소한 여성, 검찰은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 법조계는 항고 가능성을 열어두면서도, ‘항거 불능’을 입증해야 하는 높은 법적 문턱을 지적한다.

이혼 직전 전남편에게 성폭행당했다고 고소한 여성이 녹음 증거에도 '혐의없음' 처분을 받았다. /챗 지피티 생성 이미지
녹음 파일 제출했지만…‘힘의 증명’ 앞에 좌절된 성폭행 고소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남남이 되기 직전, 한 여성이 전남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녀의 손에는 당시 상황이 담긴 녹음 파일까지 들려 있었지만, 검찰의 대답은 ‘혐의없음(증거불충분)’이었다.
법률상 부부였다는 사실과, 저항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의 폭행은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법의 문턱 앞에서 좌절한 여성의 사연은 우리 사회에 ‘부부 강간’의 인정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원치 않은 성관계, 그러나 강간은 아니다” 검찰의 기묘한 논리
사건의 발단은 협의이혼 신청서를 제출한 A씨가 이혼 절차 마무리를 위해 전남편을 만나면서 시작됐다. A씨는 과거 신혼집이었던 곳에서 전남편에게 강제추행 및 강간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형사 고소에 나섰다. 결정적 증거로 강압적 상황이 담긴 녹음 파일과, 자신의 뒷머리를 찍은 영상까지 제출했다.
하지만 검찰은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불기소 이유서에 담긴 문장은 A씨의 가슴을 더욱 후벼 팠다. “고소인이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하였다고 볼 여지는 있으나, 그 유형력 정도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할 정도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보기에는 부족하다.” 원치 않은 관계는 맞지만, 강간죄를 적용할 만큼의 ‘압도적인 힘’은 증명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법조계 “항고 가능, 무고죄 걱정은 마라” 한목소리
억울함을 호소하는 A씨의 질문에 법률 전문가들은 대부분 ‘항고’(검찰 처분에 불복하는 절차)가 가능하다고 조언했다. 법무법인 시우의 김연수 변호사는 “검찰조차 ‘원하지 않는 성관계였다고 볼 여지’를 인정했다”며 “이는 완전한 허위 신고가 아니라는 방증이므로 무고죄가 성립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법률사무소 유(唯)의 박성현 변호사 역시 “무고죄는 명백한 허위 신고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검찰이 강제성 가능성을 언급한 이상 허위 신고로 보기 어렵다”고 거들었다.
변호사들은 검찰이 합의된 관계라고 단정한 것이 아니라, 강제성의 ‘정도’를 문제 삼은 만큼 항고심에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퉈볼 여지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다만 법무법인 대한중앙의 조기현 변호사는 “항고가 인용되어 실제 처벌까지 이뤄지는 경우는 1% 미만”이라며 현실적인 어려움을 지적하기도 했다.
‘혐의없음’과 ‘증거불충분’, 무엇이 다른가
A씨를 혼란에 빠뜨린 ‘혐의없음(증거불충분)’ 처분은 무슨 의미일까.
법무법인 대한중앙 한병철 변호사는 “‘혐의없음’은 말 그대로 혐의가 없다는 것이고, ‘혐의없음(증거불충분)’은 증거가 충분하지 못해 혐의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즉, 범죄가 있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것이 아니라, 기소해서 유죄를 받아낼 만큼의 증거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성범죄는 두 사람 사이의 밀실에서 벌어지는 특성상 피해자의 진술 외 명확한 물증을 확보하기 어려워 증거불충분 결정이 내려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당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법의 심판대에 세우기엔 증거가 모자라다’는 검찰의 판단인 셈이다.
‘부부’라는 이름의 족쇄…‘항거 불능’의 높은 벽
이번 사건은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부부 사이에도 강간죄가 성립한다”고 판결한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법적, 현실적 한계를 드러낸다.
당시 대법원은 혼인 관계가 실질적으로 유지되고 있더라도 폭행·협박으로 아내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했다면 강간죄가 성립한다고 못 박았다. 그러나 그 ‘본질적 침해’의 기준으로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라는 높은 잣대를 요구한다.
A씨의 사건은 별거와 이혼 신청으로 혼인 관계가 사실상 파탄 난 상태였음에도, 법률상 부부라는 점과 저항의 정도를 증명해야 하는 이중의 벽에 부딪힌 것이다. A씨의 항고는 결국 ‘그날의 힘이 얼마나 압도적이었는가’를 다시 한번 법의 저울에 올리는 외로운 싸움이 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