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재산 500만원인데…'5000만원 갚아라' 사실혼 파탄 각서의 덫
전 재산 500만원인데…'5000만원 갚아라' 사실혼 파탄 각서의 덫
사실혼 파탄 각서, '전 재산 1500만원' 남성에게 5000만원 요구…법적 효력은?

사실혼을 끝내면서 A씨는 여자의 서늘한 협박 아래 '5000만원을 지급하겠다'는 각서를 썼다./챗 지피티 생성 이미지
"말 바꾸면 회사 홈페이지에 뿌릴 거야."
2년간의 사실혼 관계에 마침표를 찍던 날, A씨는 연인 B씨의 서늘한 협박과 함께 각서 한 장을 받아들었다. 전 재산이라곤 학자금 대출 1000만원을 뺀 500만원이 전부인 그가 '5000만원을 지급하겠다'는 문구에 서명하는 순간이었다.
"공증 없어도 유효"…각서의 배신
많은 이들이 공증(공적 기관의 증명)을 받아야만 법적 효력이 생긴다고 오해하지만, 법률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르다. 법률사무소 율선의 홍경열 변호사는 "사실혼을 끝내면서 당사자 간 합의서를 썼다면 작성 절차 등에 문제가 없는 한 해당 합의서는 그 자체로 법적인 효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즉, 당사자들의 진정한 의사가 합치되어 서명했다면 계약은 유효하게 성립하는 것이 원칙이다. A씨가 이미 200만원을 지급한 사실은 계약 이행에 동의했다는 정황으로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A씨의 반격 카드 ①: "그것은 협박이었다"
그렇다면 A씨는 꼼짝없이 5000만원을 지급해야 할까. 변호사들은 각서에 포함된 '협박성 문구'에 주목했다.
법무법인 승원의 한승미 변호사는 "'이를 지키지 않았을 때 직장에 알리겠다'는 문구는 의뢰인께서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위 내용을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보여주기에, 계약 효력에 대한 다툼의 여지가 있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민법상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에 해당해 계약 자체를 취소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A씨의 반격 카드 ②: "전 재산보다 많은 돈, 불공정하다"
나아가 김경태 법률사무소의 김경태 변호사는 민법 제104조 '불공정한 법률행위'를 거론했다. 그는 "A씨의 재산이 약정 금액에 비해 현저히 적다는 점은 계약의 합리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며 "당사자의 궁박한 사정(매우 어려운 처지)을 이용해 현저하게 공정을 잃은 계약은 무효로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A씨의 재산 상황과 2년 미만의 짧은 사실혼 기간을 고려할 때, 5000만원이라는 금액은 지나치게 불공정하다는 주장이다.
소송 가도 전액 지급은 '글쎄'…법원의 '감액' 카드
만약 B씨가 민사소송을 제기한다면 법원은 어떤 판결을 내릴까. 전문가들은 각서가 유효하다고 판단되더라도 A씨가 전액을 지급할 가능성은 낮다고 입을 모았다.
법무법인 여정의 정혜성 변호사는 "민사소송이 들어온다면 감액 주장을 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위자료라고만 하기에는 금액이 상당히 크고, 재산분할의 의미가 일부 포함됐더라도 사실혼 기간, 재산 형성 기여도, 경제적 상황 등을 고려해 법원이 합리적인 수준으로 금액을 조정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결론적으로 A씨의 각서는 '강박'과 '불공정'이라는 두 방패를 앞세워 법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설령 일부 지급 판결이 나더라도 전액을 물어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랑의 끝에서 감정에 휩쓸려 서명한 한 장의 종이가 두 사람을 값비싼 감정 소모와 지독한 법적 분쟁의 굴레로 밀어 넣었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안일한 서명 하나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보여주는 씁쓸한 교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