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고백했더니 '명예훼손' 역고소…법의 칼날은 누구를 향하나
성범죄 고백했더니 '명예훼손' 역고소…법의 칼날은 누구를 향하나
성범죄 피해 고백이 '명예훼손'으로 돌아온 기막힌 사연. 법원은 피해자의 손을 들어줄까? 전문가들이 말하는 '공연성'과 '위법성 조각'의 의미를 파헤친다.

성범죄 피해를 당한 A씨가 이 사실을 연인에게 털어 놓았다가 가해자로 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는 2차 가해를 당했다./챗 지피티 생성 이미지
성범죄 고백했더니 '명예훼손' 역고소…피해자의 눈물, 법은 외면하지 않았다.
가장 믿었던 연인에게 성범죄 피해의 아픔을 털어놓은 A씨. 그러나 돌아온 것은 위로가 아닌 '명예훼손' 역고소라는 차가운 협박이었다.
힘겨운 법정 다툼 속 유일한 안식처라 믿었던 연인에게 털어놓은 끔찍한 기억. 위로와 지지를 기대했던 그 고백은, 가해자 B씨에 의해 또 다른 법적 분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공포로 되돌아왔다. 이는 성범죄 피해자를 더욱 깊은 고립으로 몰아넣는 전형적인 '2차 가해'의 모습이다.
"단 한 명에게만 말했는데, 이게 죄가 되나요?"
그렇다면 A씨는 가해자의 주장대로 정말 처벌을 받게 될까? 법률 전문가들은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단언한다. 명예훼손죄의 심장과도 같은 요건, 바로 '공연성(불특정 또는 다수가 인식할 수 있는 상태)'의 벽을 넘기 어렵기 때문이다.
법원의 명쾌한 답변 "연인과의 밀담, '공연성' 없다"
법률사무소 유(唯)의 박성현 변호사는 "신뢰 관계에 있는 연인에게만 피해 사실을 말한 것은 사적 대화 영역에 해당해 공연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물론 대법원은 단 한 사람에게 말했더라도 여러 사람에게 전파될 가능성(전파가능성 이론)이 있다면 공연성을 인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김경태 변호사는 "피해자가 파트너에게 성범죄 피해 사실을 말한 것은 사생활 영역의 개인적 대화"라며 "친밀한 관계에서 정서적 지지와 상담을 받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비방의 목적'이 없어 명예훼손 성립이 어렵다"고 명확히 선을 그었다. 연인 간의 대화는 전파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취지다.
치유를 위한 고백, 법은 '정당하다'고 본다
설령 백번 양보해 공연성이 인정된다 해도, 법원은 피해자의 고백에 '정당성'이 있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 형법은 진실한 사실을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알렸을 때 처벌하지 않는데(형법 제310조), 법원은 성범죄 피해자의 특수한 상황을 더욱 폭넓게 고려하는 추세다.
법무법인 화담 권용범 변호사는 "소송으로 인해 성범죄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경위 등을 감안하면, 연인에게 가해자의 범죄사실을 언급한 것에 정당성이 인정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대법원 역시 "성폭행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이나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대법원 2020도6965 판결)고 판시하며, 치유를 위해 아픔을 공유하는 행위 자체를 위법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입장을 확고히 했다.
주의! 연인이 '스피커'가 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다만 전문가들은 한 가지는 분명히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피해자의 아픔을 들은 연인이 이를 제3자에게 퍼뜨리고 다닌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법률사무소 장우의 이재성 변호사는 "이야기를 들은 남자친구가 그 사실을 추가로 전파한다면, 이는 가해자에 대한 명예훼손죄에 해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고백을 듣는 이의 신중함도 요구되는 대목이다.
결론적으로 성범죄 피해자가 연인 등 신뢰하는 단 한 사람에게 정서적 지지를 얻기 위해 피해 사실을 털어놓는 행위는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결국 법의 칼날은 피해자의 입을 막는 족쇄가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보듬는 방패가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