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나는 뺑소니범이 되었다
'미안하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나는 뺑소니범이 되었다
앞차의 비상깜빡임, 양해의 신호인가 사고의 증거인가

교차로에서 접촉을 인지하지 못하고 현장을 떠났다가 뺑소니범으로 몰리는 운전자 사례가 있다. / AI 생성 이미지
교차로에서 앞차의 급정거에 맞춰 차를 세웠다. 접촉은 없었다고 확신했다. 앞차가 비상등을 켜고 옆으로 빠지길래 '미안하다'는 뜻인 줄 알고 갈 길을 갔다.
며칠 뒤, 경찰서에서 '뺑소니' 신고가 접수됐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앞차 블랙박스에 '충격'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한순간의 오해가 한 운전자를 범죄자로 내모는 아찔한 법적 함정, 그 실체를 파헤친다.
'사과의 비상등'인 줄 알았는데… '사고의 신호'였다?
교차로 우회전 차선. 앞서 가던 차가 갑자기 멈췄다. A씨도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는 앞차의 뒷범퍼가 보이는 지점에서 멈춰 섰다. 다행히 부딪히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앞차가 비상등을 켜고 옆 건물 주차장 쪽으로 서행했다. A씨는 '급정거해서 미안하다는 뜻이겠거니' 하고 안심하며 제 갈 길을 갔다.
하지만 며칠 뒤 경찰서에서 날아온 연락은 A씨의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뺑소니로 신고됐습니다." 앞차 운전자가 자신의 블랙박스 영상에서 '충격'이 느껴졌다고 신고한 것이다.
A씨는 "충격을 인지했다면 왜 그 자리에서 내려 확인하지 않았는지, 갓길로 유도했다면서 왜 아무런 수신호가 없었는지 의문"이라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충격'과 '인지', 유무죄 가르는 두 개의 키워드
변호인들은 이 사건의 핵심 쟁점으로 '실제 충격이 있었는지'와 '운전자가 사고를 인지했는지'를 꼽았다.
오엔 법률사무소 백서준 변호사는 "실제 차량 충격이 있었는지가 쟁점"이라며 경찰은 앞차가 비상등을 켜고 이동한 것을 (사고 처리를 위해) 유도한 것으로 볼 것이라고 설명했다.
법무법인 오른 백창협 변호사 역시 "블랙박스 영상 등을 살펴 사고 사실을 인지했는지가 쟁점"이라며 "사고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점을 주장, 소명하는 것에 주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법원은 사고 사실에 대한 인식이 반드시 확정적일 필요는 없고 '미필적 인식'만으로도 도주 의사를 인정할 수 있다고 본다. 즉, '부딪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확인하지 않고 현장을 떠났다면 뺑소니 혐의가 성립할 수 있다는 의미다.
무혐의 주장, '독'이 될 수도...전문가 조력 필수
결국 A씨가 무혐의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충격을 전혀 느낄 수 없었고, 따라서 사고 발생 자체를 인지할 수 없었다'는 점을 객관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김경태 변호사는 "운전자가 접촉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경우에는 의무 위반으로 보기 어렵다"며 "상대방이 별도의 정차 요구나 수신호 없이 이동한 점 등은 사고 인지의 어려움을 뒷받침하는 정황"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법무법인 대청 김희원 변호사는 "가벼운 접촉사고라도 사실상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어렵다고 수사기관이 판단할 여지가 많다"고 경고했다.
법무법인 대한중앙 조기현 변호사도 "변호사 조력 없이 무리하게 무혐의 주장을 하다 보면 오히려 범행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판단되어 불리해질 수 있다"며 섣부른 단독 대응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블랙박스 영상 확보, 일관된 진술 유지, 변호사 조력을 통한 초기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