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싱 막았더니 1350만원 묶였다"…내 돈 지키려다 '제도의 덫'
"피싱 막았더니 1350만원 묶였다"…내 돈 지키려다 '제도의 덫'
'제권판결'도 안 통해…변호사들 "경찰이 수표 실물 압수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

보이스피싱으로 9천만 원 수표를 사기당한 피해자는 은행의 담보금 요구와 법적 무효화 불가로 이중고를 겪고 있다./챗 지피티 생성 이미지
내 돈 지키려다 묶인 1350만원, 은행은 왜 안 주나
"엄마가 사기당한 것 같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어머니의 울먹임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검찰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조직에 9천만원짜리 자기앞수표를 건넸다는 것이다.
가족은 즉시 은행에 달려가 지급정지를 신청했고, 수표가 현금으로 인출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막아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도 잠시, 은행 창구 직원은 뜻밖의 말을 건넸다. "지급정지를 유지하려면 피해액의 15%, 1350만원을 '사고신고담보금'으로 예치하셔야 합니다."
내 돈 9천만원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내 돈 1350만원을 내놓아야 하는 아이러니. 보이스피싱 피해자 가족의 진짜 싸움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내 돈 지키려다 묶인 1350만원, 은행은 왜 안 주나
피해자 가족의 발목을 잡은 사고신고담보금은 무엇일까.
이는 수표 분실·도난 등을 신고했을 때 은행이 예치받는 일종의 보증금이다. 만약 나중에 수표를 가진 제3자가 나타나 정당한 권리자라며 돈을 요구할 경우, 은행이 대신 물어줘야 할 위험에 대비하는 돈이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억울하지만, 은행의 위험 관리 절차상 불가피한 조치다.
'수표 휴지조각' 만드는 제권판결, 사기엔 '그림의 떡'인 이유
답답한 마음에 피해자들은 법원에 수표를 무효로 해달라고 신청하는 '제권판결(除權判決)'을 떠올리기 쉽다. 제권판결이란, 수표를 잃어버렸을 때 법원의 공고 절차를 거쳐 해당 수표를 휴지 조각으로 만드는 제도다.
하지만 법률 전문가들은 보이스피싱 사기에는 이 절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법률사무소 유(唯)의 박성현 변호사와 법무법인 심의 심준섭 변호사 등 다수 전문가는 "제권판결은 분실이나 도난처럼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수표를 잃었을 때 쓰는 제도"라며 "보이스피싱은 비록 속아서 한 행위일지라도 스스로 수표를 '교부'한 경우라 법적으로 '분실'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사기로 인한 교부는 법률상 '편취'로 분류돼, 제권판결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길에서 지갑을 떨어뜨린 것(분실)과, 가짜 명품인 줄 모르고 돈을 주고 산 것(사기)을 법이 다르게 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결국 법원을 통한 손쉬운 해결책은 없다는 의미다. 피해자 가족이 마지막 희망으로 여겼던 법원을 통한 지름길마저 막혀버린 순간이었다.
법원도 은행도 '절레절레'…모든 길은 경찰서로 통한다
모든 법률 전문가가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는 해법은 단 하나, 바로 경찰 수사를 통한 '수표 실물 회수'다. 김경태 법률사무소의 김경태 변호사는 "수사기관이 수거책을 검거해 수표를 압수하게 되면, 수표의 무효화 절차를 통해 사고신고담보금을 환급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수표 발행 당시 CCTV, 사기범과의 통화 내역, 전달 장소 주변의 추가 영상 등 증거자료를 최대한 확보해 경찰에 적극 협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법무법인 공명의 김준성 변호사는 "최근 유사 사건에서 피의자들이 검거되는 사례가 늘고 있어 희망적인 상황"이라며 포기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경찰이 수사를 종결하고 해당 수표를 말소 처리해달라고 은행에 요청하는 것이, 9천만원의 완전한 안전과 1350만원의 담보금을 되찾을 유일한 길인 셈이다.
경찰만 기다릴 순 없다…피해자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들
경찰 수사 협조와 별개로 피해자가 취할 수 있는 추가 조치도 있다. 사기죄로 가해자들에 대한 형사 고소를 진행해 수사 과정에서 합의를 유도하거나, 범인이 검거된 후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는 방법이다. 또한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금융감독원에 피해구제를 신청하는 절차도 활용할 수 있다.
결국 피해자는 범죄 조직과 싸워 이겼지만, 이제는 시스템과 싸워야 하는 외로운 처지에 놓였다. 범인을 잡아 수표를 되찾기 전까지, 내 돈 9천만원은 은행의 위험 관리를 위한 '인질'이 되고, 내 돈 1350만원은 그 인질을 지키는 '몸값'이 되는 역설.
이번 사건은 범죄 피해자가 왜 은행의 잠재적 손실까지 책임져야 하는지, 우리 금융 시스템의 근본적인 공백을 날카롭게 찌른다. 피해 구제의 첫걸음부터 거대한 벽에 부딪히는 이들을 위해, '일단 막고 보자'는 식의 소극적 대응을 넘어선 더 촘촘하고 적극적인 제도적 뒷받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