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적 저항은 동의" 무죄 논리 사라져...강간죄 '항거불능' 기준 재정립됐다
"소극적 저항은 동의" 무죄 논리 사라져...강간죄 '항거불능' 기준 재정립됐다
원심의 치명적 오판
'묵시적 동의'가 낳은 성폭력 무죄의 반복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성폭력 사건의 하급심(원심)에서 피해자의 명확한 거부 의사나 소극적 저항을 "애매한 신호"나 "가해자의 오해 가능성"으로 해석하여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사례가 반복되어 논란이 되었다.
이러한 판결들은 대법원이 강조한 '성인지 감수성'을 결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항소심(고등법원)에서는 이러한 원심 판결이 뒤집히거나, 설령 무죄가 유지되더라도 그 법적 쟁점이 명확히 재정립되는 흐름이 나타났다. 아래 두 가지 유사 판례의 흐름을 통해 무죄가 유죄로 바뀐 결정적인 이유를 사건별로 분석한다.
[1] "살려쥬" 카톡이 뒤집은 무죄
인천지방법원 2022. 5. 13. 선고 2021노1162 판결
원심이 무죄를 선고한 이유: '묵시적 동의' 오해
원심은 피고인이 피해자의 허벅지를 쓰다듬은 행위가 있었으나, 음부 접촉이 있기 전까지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명시적으로 표한 적이 없었다는 점을 중시했다. 피해자가 내심 불쾌했더라도 피고인이 허락하는 것으로 오해했을 수 있다며, 추행의 고의를 인정하지 않고 무죄를 선고했다.
항소심이 유죄로 판단한 결정적 증거: '즉각적인 피해 호소'
항소심은 원심 판단을 뒤집고 유죄를 인정했다.
그 핵심 근거는 피해자 진술의 높은 신빙성과 이를 뒷받침하는 객관적 증거였다.
- 즉각적인 피해 호소: 피해자가 추행 당시 곧바로 친구 C에게 카카오톡으로 "살려쥬", "이새끼 존나 만져낸즈짜" 등의 메시지를 전송하고, C가 이를 받고 112에 신고한 기록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 성인지 감수성 적용: 피해자가 "계속 너무 착해서 받아주는 스타일이고, 말을 못하는 성격"이었다는 점 등 피해자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해, 명시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진술 신빙성을 배척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 피고인의 사후 사과: 피고인이 사건 직후 피해자에게 "불미스러웠던 일은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한 메시지 역시 고의성을 뒷받침했다.
- 결론: 항소심은 음부 추행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며 즉각적인 통신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만, 허벅지 접촉 부분은 추행 고의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원심과 같이 무죄를 유지했다.
[2] '생리 중'에도 강행, 유쾌한 장난이 '폭행'으로
서울고등법원 2019. 8. 20. 선고 2018노3367 판결
원심이 무죄를 선고한 이유: '항거불능' 부족
원심은 피고인이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간음한 것은 맞지만, 피해자가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을 가했다는 점이 증명되지 않았다고 보아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의 "하지 말라"는 거부가 사랑하는 남녀 사이의 '밀고 당기기'나 '유쾌한 장난'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논리가 배후에 작용했다.
항소심이 유죄로 판단한 결정적 증거: '피해자의 특수 상황'과 '물리력'
항소심은 원심의 판단을 전면적으로 뒤집고 강간죄를 인정하며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다.
- 명확한 거부와 물리적 저항: 피해자가 "하지 말라"는 의사를 일관되게 표시했고, 바지 지퍼와 팬티를 잡거나 피고인의 상체를 미는 등 물리적으로 저항했음이 진술을 통해 확인되었다.
- 항거불능 상태 이용: 피해자가 술에 취해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였고, 피고인(170cm)이 피해자(151cm)를 물리적으로 제압하여 양손을 한 손으로 잡고 바지를 벗긴 행위가 강간죄의 폭행으로 인정되었다.
- 생리 중인 상태: 피해자가 생리 중이었음에도 성관계를 강행했고, 실제로 생리혈이 묻은 점은 피해자가 성관계를 희망하거나 동의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강력한 정황 증거가 되었다.
- 결론: 항소심은 성인지 감수성을 적극 적용하여 "사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나 소리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유형력 행사가 없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며, 피해자의 특수한 상황을 이용한 피고인의 행위를 강간죄로 엄중히 처벌했다.
대법원의 '성인지 감수성', 법원의 판단 기준을 바꾸다
이 두 판례의 흐름은 성폭력 사건에서 대법원이 요구하는 '성인지 감수성'이 하급심의 잘못된 판단을 어떻게 바로잡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법원이 "피해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피해자의 관점을 수용하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피해자가 명확하고 일관된 증거를 통해 자신의 거부 의사와 심신 상태를 입증하는 것이 최종 승소의 열쇠다.
특히, 이 사례들은 사건 직후 지인에게 알린 통신 기록과 거부 의사를 뒷받침하는 피해자의 신체적 상태(생리 중, 음주 상태)가 무죄를 유죄로 뒤바꾸는 결정적 증거였음을 확인시켜준다.
이제 법원은 거부 의사를 '애매한 신호'가 아닌,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었다는 강력한 증거로 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