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미끼에 통장 넘겼다 ‘금융 식물인간’ 신세” 피해자가 피의자로, 왜?
“대출 미끼에 통장 넘겼다 ‘금융 식물인간’ 신세” 피해자가 피의자로, 왜?
한순간의 실수가 부른 '사기 공범' 혐의…'고의성' 입증 못 하면 실형에 민사소송까지

1금융권 대출이라는 달콤한 제안에 속아 통장 접근 정보를 넘겨준 A씨가 보이스피싱 범죄의 공범으로 몰렸다. /챗 지피티 생성 이미지
대출해준다기에 비밀번호 넘겼는데… 사기 공범 몰린 20대 “저도 피해자예요”
급전이 필요해 넘긴 계좌번호 하나가 20대 청년의 모든 금융생활을 멈춰 세웠다. 1금융권 대출이라는 달콤한 제안에 속아 통장 접근 정보를 넘겨준 A씨가 보이스피싱 범죄의 공범으로 몰려 모든 금융 거래가 막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A씨에게 ‘1금융권 대출’ 제안은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상담원은 대출 심사를 위해 필요하다며 토스 인증번호와 비밀번호, 신분증 사진까지 요구했다. “다른 어플 연동은 다 끊으라”는 지시까지 의심 없이 따랐다. 그러나 며칠 뒤, A씨의 통장은 거액의 돈이 오가는 범죄 조직의 ‘자금 세탁소’로 전락해 있었다.
결국 A씨의 토스 계좌에는 ‘지급정지’라는 족쇄가 채워졌다. 경찰은 “조사받으러 오라”는 말만 남겼고, 설상가상으로 며칠 뒤 A씨 명의의 모든 계좌가 동결돼 이체조차 불가능한 ‘금융 식물인간’ 상태가 됐다. A씨는 “통장을 넘긴 건 잘못이지만 저도 명백한 사기 피해자”라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나는 피해자인데, 왜 피의자인가요?
A씨는 스스로를 피해자라 믿지만, 법의 시선은 냉정하다. 법무법인 공명의 김준성 변호사는 “A씨의 행위는 사기방조죄, 전자금융거래법위반죄 등에 해당할 수 있는 전형적인 대포통장 사건”이라고 진단했다. 현행법은 어떤 이유로든 타인에게 통장이나 카드의 접근매체(비밀번호, 인증번호 등)를 넘기는 행위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한다.
수사기관은 보이스피싱 총책 검거가 어려운 현실 탓에, 계좌를 빌려준 명의자를 상대로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인다. 이 과정에서 A씨는 피해자가 아닌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게 된다. 법무법인 오른의 백창협 변호사는 “사기 공범 혐의는 고의성을 부인하고,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은 양형에 집중해 처벌 수위를 낮추는 투트랙 전략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대출 수단' vs '대가', 운명을 가를 재판의 저울
A씨의 운명을 가를 핵심 쟁점은 ‘고의성’ 여부다. 자신의 계좌가 범죄에 사용될 것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싸움이다. 반포 법률사무소의 이재현 변호사는 “접근매체를 넘긴 것이 ‘대출을 받기 위한 절차상 수단’이었는지, 아니면 통장 대여의 ‘대가’로 대출을 약속받은 것인지에 따라 유무죄가 갈린다”고 설명했다.
법원은 ▲접근매체를 넘기게 된 경위 ▲사기범과 나눈 대화 내용 ▲교부한 접근매체의 개수 ▲과거 대출 경험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범죄 의도를 따진다.
법무법인 베테랑의 윤영석 변호사는 “본인에게 사기의 범의(범죄 의도)가 없었음을 입증하기 위해 사기범과 나눈 카카오톡 대화, 통화 녹음 등 모든 정황 증거를 모아 논리를 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약 ‘미필적 고의(범죄 발생 가능성을 알면서도 용인한 경우)’라도 인정되면 사기방조죄가 적용돼 집행유예 없는 실형이 선고될 수 있다. 형사 처벌과 별개로 보이스피싱 원조 피해자가 제기하는 민사소송까지 책임져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꽁꽁 묶인 내 돈, 언제쯤 풀 수 있나
당장 생계가 막막해진 A씨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지급정지 해제다. 하지만 올인 법률사무소의 허동진 변호사는 “지급정지는 현실적으로 빠른 시일 내에 풀기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법무법인 중산의 김영오 변호사에 따르면 지급정지를 푸는 길은 두 가지다.
첫째, 수사 결과 무혐의 처분을 받거나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그 결정문을 은행에 제출하는 것이다. 둘째, 돈을 사기당한 ‘진짜 피해자’와 합의해 합의서를 제출하는 방법이다.
두 가지 모두 A씨가 혐의에서 벗어나거나, 피해 회복에 적극 나서야만 가능한 험난한 길이다.
한순간의 실수로 피해자에서 피의자로 전락한 A씨. ‘나도 피해자’라는 그의 외침이 수사기관과 법원에 닿을 수 있을지, 길고 외로운 법적 싸움이 시작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