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서 쓰고 뒤로는 개인회생… 전세사기 집주인의 ‘합법적’ 보증금 회피술
각서 쓰고 뒤로는 개인회생… 전세사기 집주인의 ‘합법적’ 보증금 회피술
피해자 6명 보증금 2억 9천만원 묶여
'성실 채무자' 구제 제도가 '악성 임대인' 면죄부로 전락
“보증금 꼭 돌려주겠다” 각서까지 쓴 집주인, 돌연 개인회생 신청해 세입자들 길거리로 내몰 위기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반드시 보증금을 돌려주겠다”며 자필 각서까지 써줬던 집주인이 세입자들 몰래 법원에 개인회생을 신청, 보증금 반환을 회피하려는 정황이 드러나 공분을 사고 있다.
성실한 채무자를 구제하기 위한 법의 선의가 악성 임대인의 책임 회피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믿음의 대가는 '경매 딱지' 한 장
14일 법조계와 피해자들에 따르면, 대구 동구의 한 다가구주택에 5년간 살아온 임차인 A씨(34)의 평온한 일상은 올해 초 한 장의 공지문으로 산산조각 났다. 먼저 살던 세입자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자 집주인 B씨(70) 소유의 건물을 경매에 넘겼다는 내용이었다.
A씨를 포함한 건물 내 세입자 6명이 돌려받아야 할 보증금은 총 2억 9000여만 원에 달했다.
불안에 떠는 세입자들에게 집주인 B씨는 “걱정 말라”며 보증금 전액 반환을 약속하는 각서를 써주며 이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이 약속은 세입자들의 뒤통수를 치기 위한 기만행위에 불과했다. B씨는 지난 3일, 세입자들 몰래 법원의 문을 두드려 개인회생을 신청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법원의 선의가 '악성 집주인'의 무기로… 세입자는 '빚쟁이' 전락
개인회생은 성실하지만 과도한 빚으로 고통받는 채무자를 법원이 구제해주는 제도다.
법원이 B씨의 개인회생 신청을 받아들이는 순간, 진행 중이던 경매 절차는 즉시 중단된다. 동시에 세입자들은 보증금을 돌려받을 권리를 가진 임차인에서 B씨의 여러 빚쟁이 중 한 명인 ‘채권자’로 지위가 바뀐다.
이는 곧 법원이 정해준 변제 계획에 따라 보증금의 일부만 돌려받거나, 최악의 경우 한 푼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의미다. 피해자 A씨는 “어떻게 사람을 구제하는 법이 보증금을 떼먹으려는 꼼수로 악용될 수 있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고의성 입증은 세입자 몫”… 두 번 우는 피해자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대구시 전세피해지원센터의 반응은 더 절망적이었다.
센터 측은 “집주인의 고의성이 입증되지 않으면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되기 어렵다”며 사실상 수사기관의 판단이 나오기 전에는 지원이 어렵다는 입장을 되풀이했다. 피해 사실 입증 책임마저 고스란히 피해자에게 떠넘겨진 셈이다.
결국 A씨 등 피해자들은 B씨를 사기 혐의로 경찰에 고소하며 스스로 싸움에 나섰다. 선량한 채무자를 돕기 위한 법 제도가 어떻게 전세사기 가해자의 책임 회피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는지, 그 위험한 현실을 이번 사건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