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인 줄 알았는데 보이스피싱 공범이라니"... 피해자에서 피의자로, 한순간에 바뀐 운명
"대출인 줄 알았는데 보이스피싱 공범이라니"... 피해자에서 피의자로, 한순간에 바뀐 운명
전문가들 "범죄 인식 시점과 신고 경위, 일관된 진술로 '고의성 없음' 입증해야"

대출을 받으려다 보이스피싱 현금 수거책이 되어 사기방조 혐의를 받은 경우, 범죄의 '고의성'이 없었음을 입증하는 것이 핵심이다. / AI 생성 이미지
대출 상담인 줄 알고 돈 심부름했다가 보이스피싱 공범 혐의를 받게 된 A씨. 억울함을 벗기 위한 법적 대응 방안을 전문가들과 함께 짚어본다.
"실적이 부족하니 한 번 더 똑같은 일을 해줘야 합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말에 A씨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저금리 대출을 받기 위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자신이 보이스피싱 범죄의 현금 수거책으로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A씨는 이날 이후 보이스피싱 '피해자'이자 '피의자'라는 기구한 운명에 놓이게 됐다.
사건의 시작은 한 통의 전화였다. 지난 12월, 모 금융사를 사칭한 상담원은 A씨에게 "거래 내역을 만들어주면 그 실적을 기반으로 대출을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A씨는 대출이 가능하다는 말에 의심 없이 그들이 시키는 대로 자신의 주거래 계좌로 두 차례 돈을 입금받았다.
조직원은 "받은 돈을 수표로 찾아 다시 전달해달라"고 했다가 갑자기 "달러로 바꿔야 한다"며 말을 바꿨다. 은행 직원이 물으면 "외국 여행 갈 때 쓸 돈"이라고 말하라는 구체적인 지시까지 내렸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그때부터 느낌이 이상했다"고 진술했다.
불안감은 현실이 됐다. 조직원의 지시대로 회사 앞에서 '실장'이라는 사람을 만나 돈을 건네자, 그들은 대출은커녕 "실적이 30% 부족하다"며 똑같은 일을 한 번 더 요구했다. 그제야 모든 것이 사기임을 확신한 A씨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범인을 잡기 위해 경찰과 공조해 약속 장소에 나가기도 했지만, 조직원이 연락을 끊으면서 검거는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A씨는 사건의 신고자이자 참고인, 동시에 사기방조 혐의를 받는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앞두게 됐다.
'피해자'에서 '피의자'로... 왜 공범 혐의를 받나
A씨처럼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이 보이스피싱 공범으로 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법조계에서는 A씨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범죄 조직의 사기 행위를 도운 '방조'에 해당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비록 속아서 한 일이라도, 범죄에 사용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용인했다는 '미필적 고의'가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법무법인 공명의 김준성 변호사는 "대부분 범죄에 연루된 사람들이 A씨와 같이 범죄에 가담한다는 의사는 없이 행위하게 된다"면서도 "하지만 검찰과 법원에서는 여러 가지 사정들을 종합하여 피의자의 범죄 고의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범죄 의도가 없었더라도 객관적인 행위만으로 혐의를 받기에 충분하다는 의미다.
최근 보이스피싱 범죄를 엄벌하는 추세에 따라 처벌 수위도 매우 높다. 법무법인 오른의 백창협 변호사는 "보이스피싱 공범 혐의를 부인하기는 어려운 사안으로 보인다"며 "합의가 되지 않는다면 징역형이 선고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몰랐다"는 항변, 법정에서 통하려면? '고의성' 입증의 길
결국 A씨가 혐의를 벗기 위한 핵심은 '고의성'이 없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A씨의 사건 경위에 희망적인 요소들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범죄를 의심하게 된 시점과 그 직후의 행동이 바로 그것이다.
법률사무소 새율의 최성현 변호사는 "'이상함을 느낀 시점'을 구체적으로 진술한 것은 매우 적절했다"며 "이는 A씨가 범행에 적극 가담한 것이 아니라, 속아서 이용당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정황"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보이스피싱임을 확신한 후 즉시 경찰에 신고하고 검거 협조까지 시도한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는 A씨의 선의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진술의 '일관성' 역시 무죄를 주장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무기다. 법무법인 우승의 전영경 변호사는 "경찰 조사와 검찰 조사에서의 진술 신빙성은 진술이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실제로 겪은 일을 차근차근 일목요연하게 답변하면 조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검찰 조사라는 '골든타임',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경찰의 손을 떠나 검찰로 넘어간 사건은 더욱 심층적으로 다뤄진다. 검찰 조사는 A씨의 운명을 가를 '골든타임'인 셈이다.
오엔 법률사무소의 백서준 변호사는 "경찰에서 비슷하게 진술했으나 경찰은 검찰로 송치했을 것"이라며 "검찰에서 한 번 더 부르는데, 이번엔 더 디테일하게 물어본다. 검찰 조사에 잘 대답하면 불기소로 마무리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검찰 조사 대비책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간 순서에 따른 사실관계 정리다.
처음 대출 제안을 받은 순간부터 돈을 전달하고, 의심을 품고, 신고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시간 순으로 정리해 진술의 혼선을 막아야 한다.
둘째, 객관적 증거자료 확보다.
조직원과 나눈 문자 메시지, 통화 기록, 계좌 이체 내역 등은 A씨의 주장을 뒷받침할 강력한 무기다.
셋째, '고의성 없음'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정황 설명이다.
왜 처음에는 사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어떤 지점에서 의심을 시작했으며, 왜 즉시 신고했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법률 전문가의 조력을 받는 것이다. 다수의 변호사들은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는 만큼, 진술이 불리하게 해석되는 것을 방지하고 법적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변호사와 동행하는 것을 강력히 권장한다"고 입을 모았다.
보이스피싱 범죄는 한 개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다. A씨의 사례는 누구든 범죄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 몰릴 수 있다는 사회적 경각심을 일깨운다. 억울한 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한 철저한 법적 대응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