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억대 도박' 들통 알린 경찰 통지서…'기다리라'는 말의 진짜 의미는?
'수억대 도박' 들통 알린 경찰 통지서…'기다리라'는 말의 진짜 의미는?
금융거래정보제공 사실통보서 받은 A씨, 섣부른 자수보다 '양형자료' 준비가 먼저

수억원대의 불법 도박을 해온 A씨가 경찰서에서 날아온 '금융거래정보 제공사실 통보서'를 받아 들고 경악하고 있다. /제미나이 생성 이미지
"벌금 낼 돈도 없는데…" 경찰의 '기다리라'는 답변에 희망을 건 A씨. 그러나 변호사들은 "수사 시작 신호"라며 고개를 저었다.
어느 날 경찰서에서 날아온 통지서 한 장이 A씨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자신의 금융거래 내역이 경찰에 넘어갔다는 '금융거래정보 제공사실 통보서'였다. 수개월간 이어진 수억 원대 불법 도박의 꼬리가 마침내 잡힌 순간이었다.
통지서를 받아 든 A씨는 서둘러 입출금 내역을 살폈다. 그곳에는 수개월에 걸쳐 수억 원이 오간, 스스로도 믿기 힘든 도박의 흔적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겁에 질린 A씨는 담당 경찰관에게 전화를 걸어 자수 의사를 밝혔지만, 돌아온 답변은 차가웠다.
"지금 수사해보고 검토할 겁니다. 처벌할 수도, 종결할 수도 있으니 전화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이 모호한 답변은 A씨를 더 깊은 공포로 밀어 넣었다.
"기다리라"는 경찰, 수사 중단 아닌 '폭풍전야'
혹시 사건이 조용히 묻힐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검사 출신 현승학 변호사(법무법인 선)는 "수사기관에서 '일단 기다리라'고 한 것은 의뢰인 외에 다른 피혐의자들에 대한 내사를 마친 뒤 한꺼번에 입건 및 조사를 하기 위함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사실상 A씨에 대한 수사는 피하기 어려운 수순에 들어섰다는 경고다.
경찰 출신 강민기 변호사(법률사무소 새율) 역시 "수억 원대 거래라면 단순 도박을 넘어 자금 흐름과 출처에 따라 도박 개장이나 자금세탁 등 추가 범죄로 확대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안일한 기대를 경계했다. 경찰의 침묵은 사건 종결이 아닌, 더 큰 수사를 위한 '폭풍전야'일 수 있다는 의미다.
'단순 도박'과 '상습 도박', 운명 가를 법의 잣대
A씨의 운명을 가를 핵심은 '상습성' 인정 여부다. 현행법상 일시오락을 넘어선 도박은 형법 제246조 1항에 따라 '단순 도박죄'로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하지만 A씨처럼 수개월간 수억 원의 돈이 오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법원은 이를 상습적인 행위로 판단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이 가중되는 '상습도박죄'(형법 제246조 2항)를 적용할 가능성이 크다. 박성현 변호사(법률사무소 유)는 "도박 금액이 크고 기간이 길다면 단순 도박죄보다는 상습도박으로 처벌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지적했다. A씨가 마주한 현실이 벌금형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섣부른 자수, '독'이 될 수도…핵심은 '반성의 증거'
A씨는 이미 경찰에 전화해 자수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선처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 형법상 자수는 법관의 재량으로 형을 감경할 수 있는 '임의적 감경사유'일 뿐, 의무적으로 형을 깎아주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문가들은 섣부른 추가 진술을 경계했다.
박성현 변호사는 "구체적인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섣불리 추가 진술을 하기보다 신중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결국 핵심은 '어떻게 반성하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
백창협 변호사(법무법인 오른)는 "혐의를 부인할 사안이 아니므로, 재발 방지 대책에 중점을 둔 양형(형벌의 수위를 정하는 과정)에 집중해 처벌 수위를 낮추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 조사가 전부"…벼랑 끝 A씨가 잡아야 할 동아줄은?
그렇다면 A씨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변호사들은 '첫 조사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입을 모았다. 성현상 변호사(법무법인 태신)는 "수사 첫 진술이 가장 중요하다"며 "지금 바로 변호인의 조력을 받아 양형자료를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선처를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형자료란 진심이 담긴 반성문, 도박에 이르게 된 경위, 경제적 어려움을 증명하는 서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재발 방지 노력'을 포함한다. 한국도박문제예방치유원 등 전문기관의 상담이나 치료 프로그램에 등록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현승학 변호사는 "자백하는 사건이더라도 변호사의 수사 대응에 따라 처분의 수위가 크게 달라진다"며 전문가 조력의 중요성을 재차 확인했다. 경찰의 모호한 답변에 희망을 걸기보다,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고 '두 번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법정에서 증명하는 것만이 A씨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동아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