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서 냈더니 '고소장' 써오라는 경찰, 중고 사기당한 김씨의 운명은?
진정서 냈더니 '고소장' 써오라는 경찰, 중고 사기당한 김씨의 운명은?
'내사'와 '입건'의 갈림길, 참고인과 피의자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 당신의 권리를 지키는 법률 상식

온라인 중고거래 사기를 당한 A씨가 경찰서에 진정서를 내자, 경찰은 고소장을 써올 것을 권했다./챗 지피티 생성 이미지
온라인 중고거래 사기를 당한 김씨는 떨리는 손으로 진정서를 냈지만, 경찰의 다음 한마디에 모든 것이 멈췄다.
평화로운 주말, 김씨는 인터넷 중고 장터에서 눈여겨보던 카메라를 시세보다 저렴하게 구매했다. 하지만 돈을 부치자 판매자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분노와 억울함에 잠 못 이루던 김씨는 다음 날 경찰서로 달려가 사기꾼을 잡아달라며 빼곡히 '진정서'를 써냈다. 며칠 뒤, 담당 경찰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 이거 고소장으로 다시 써서 제출해주시겠어요?"
김씨는 당황했다. 이미 사정은 다 설명했는데, 왜 굳이 서류를 다시 쓰라는 걸까? 이 순간 김씨는 경찰 수사의 첫 번째 갈림길, '진정'과 '고소'의 거대한 문 앞에 서 있었다. 겉보기엔 비슷한 두 장의 서류가, 한 사람의 운명을 '단순 민원인'과 '형사 절차의 주인공'으로 갈라놓는다.
"조사만 해주세요" vs "처벌해주세요"… 경찰을 움직이는 결정적 한마디
김씨가 처음 낸 진정은 말 그대로 '사정을 하소연하는' 비공식 요청이다. 경찰은 진정서를 받아보고 수사를 시작할지 말지 결정할 재량권을 갖는다. 만약 혐의가 애매하다고 판단하면 '내사(內査·입건 전 조사) 종결' 처분으로 사건을 덮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김씨는 수사 결과에 이의를 제기할 공식적인 방법도 없이 발만 동동 구르게 된다.
반면 경찰이 요구한 고소(告訴)는 차원이 다르다. 이는 범죄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구하는 강력하고 공식적인 의사표시다. 형사소송법이 보장하는 권리이기에, 고소장이 접수되면 경찰은 반드시 수사를 시작해야 할 '의무'를 진다. 설령 나중에 검사가 불기소 처분을 내리더라도, 김씨는 항고나 재정신청을 통해 '한 번 더' 다툴 수 있는 막강한 카드를 쥐게 된다.
나는 참고인인가, 피의자인가… '입건'을 둘러싼 신분의 줄타기
진정서가 접수된 단계에서 김씨에게 사기를 친 판매자는 '피진정인' 신분으로 경찰의 내사를 받는다. 이때 그는 범죄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참고인'으로 불린다. 만약 이 단계에서 판매자가 돈을 잘못 보냈다거나 택배가 분실됐다는 식의 그럴듯한 알리바이를 대고 혐의를 벗는다면, 사건은 정식 수사로 넘어가지 않고 '내사 종결'로 끝날 수 있다. 그의 신분은 범죄 기록에 한 줄도 남지 않는 깨끗한 상태로 남는다.
하지만 경찰이 내사 과정에서 사기 혐의가 명백하다고 판단하면, 사건을 정식으로 '입건'한다. 바로 이 순간, 판매자의 신분은 참고인에서 '피의자'로 극적인 전환을 맞는다. 이제 그는 본격적인 형사 절차라는 레일 위에 올라탄 신세가 되어 강도 높은 수사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왜 경찰은 '귀찮게' 고소장을 다시 요구했을까?
김씨의 의문으로 돌아가 보자. 경찰은 왜 그에게 '귀찮은' 일을 시키려 했을까? 일부에서는 절차가 명확한 고소 사건이 경찰의 '업무 편의'에 좋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김씨, 즉 피해자의 '권리 보호'에 있다.
경찰수사규칙 제21조는 진정 내용이 실질적으로 고소 요건을 갖췄다면 고소로 수리할 수 있다고 정한다. 경찰이 김씨에게 고소장 작성을 '안내'한 것은, 향후 수사 결과에 불복할 권리 등 법이 보장하는 모든 장치를 김씨가 온전히 누리게 하려는 배려인 셈이다.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피해자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한 일종의 '가이드'였던 것이다.
하소연에 그칠 것인가, 권리를 되찾을 것인가
결론적으로 김씨처럼 명백한 범죄 피해를 입었다면, 망설이지 말고 '고소'를 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수사 개시를 보장받고, 사건 진행 상황을 통지받으며, 결과에 불복할 권리까지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은 가해자가 누군지 특정하기 어렵거나, 처벌보다는 진상 규명이 더 중요할 때 고려해볼 수 있는 차선책이다.
김씨의 억울함이 경찰의 서류철 속에서 단순한 '하소연'으로 흩어질지, 아니면 사기꾼을 법정에 세우는 날카로운 '권리 행사'가 될지는 이제 그의 손에 달렸다. 법의 문을 두드리기 전, 내가 쥔 카드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모든 싸움의 시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