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받고 통장 만들었을 뿐인데…어느 날 '사기 공범'이 된 그녀
월급 받고 통장 만들었을 뿐인데…어느 날 '사기 공범'이 된 그녀
[법률분석] '상사 지시'로 만든 통장이 대포통장으로…경리직원, 처벌 피할 수 있나

상사 지시로 만든 통장이 '대포통장'으로 악용돼 범죄 혐의를 받게 된 경우, 처벌의 핵심은 '고의성' 여부다. /챗 지피티 생성 이미지
평범한 직장인을 범죄자로 내모는 '대포통장'의 덫, 법적 쟁점과 대응법을 심층 분석했다.
퇴사 6년 차, A씨의 휴대폰에 찍힌 '경찰서' 세 글자는 평범했던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월급을 받기 위해 상사 지시로 만들었던 통장 하나가, 그를 '사기 공범'으로 몰고 있었다.
경찰 전화 한 통에 무너진 6년의 평온
A씨의 악몽은 2025년 9월, 한 통의 전화로 시작됐다. 6~7년 전 서울의 한 코인 거래소에서 경리직원으로 일했던 그녀에게 부산경찰서 수사관이 물었다. "서울의 한 은행에서 법인 통장을 만든 적 있느냐"는 것이었다.
대표 지시로 개설했던 바로 그 통장이었다. 회사가 합병되고 대표가 바뀌면서 퇴사한 지 오래. 까맣게 잊고 있던 통장이 보이스피싱 범죄에 '대포통장'으로 악용됐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불안감은 3개월 뒤 강원도경찰서에서 날아온 '금융거래정보 제공 통보서'로 극에 달했다. '법원 명령', '영장 청구' 같은 섬뜩한 단어들은 그녀를 밤잠 설치게 했다.
A씨는 "대가로 10원 한 장 받은 것 없고, 시키는 대로 일했을 뿐인데 경찰서에서 계속 연락이 오니 미칠 것 같다"며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성실히 일한 대가가 범죄 혐의라는 덫으로 돌아온 것이다.
'단순 참고인' vs '실형도 각오해야'…변호사들도 의견 가른 '고의성'의 덫
A씨는 과연 처벌받을까. 그녀의 행위는 형법상 '사기방조죄'나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를 받을 수 있다. 처벌의 핵심 열쇠는 '범죄에 이용될 것을 알았는가'하는 '고의성' 여부다.
특히 법원은 '미필적 고의(dolus eventualis)'를 폭넓게 인정하는데, 이는 '범죄에 쓰일 수도 있겠다고 어렴풋이 예상하면서도 설마 무슨 일 있겠어? 라며 용인하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 이 지점에서 법률 전문가들의 의견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다수의 변호사들은 A씨가 처벌받을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이장주 변호사(법무법인 영진)는 "통장 개설 경위를 충분히 설명하면 문제없을 것"이라며 단순 참고인 조사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김경태 변호사 역시 "금전적 대가를 받지 않았고, 불법성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은 고의가 없었음을 주장할 매우 중요한 요소"라며 A씨의 무혐의 가능성에 무게를 실었다.
반면, 일부 변호사들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경고를 보냈다. 김준성 변호사(법무법인 공명)는 "이런 사건은 혐의가 인정되는 경우가 많다"며 "만약 미필적 고의가 인정되면 집행유예 없는 실형이 선고될 수도 있다"고 강력히 경고했다.
그는 심지어 "변호인의 도움을 받아 자수하는 편이 낫다"는 의견까지 제시하며 사안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평범한 직장인의 업무 행위가 법원의 저울 위에서 '순진한 실수'와 '범죄 방조'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갈 수 있다는 의미다.
법원의 저울, A씨는 '순진한 직원'일까 '범죄의 조력자'일까
법원은 통장 명의자를 처벌할 때 미필적 고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몇 가지를 본다. 판례에 따르면 ▲대면 면접 없이 비정상적으로 채용된 경우 ▲텔레그램 등 익명 메신저로만 업무 지시를 받은 경우 ▲수익의 일부를 대가로 약속받은 경우 등은 범죄조직의 하수인으로 보고 엄격하게 처벌한다.
하지만 A씨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정상 채용된 정직원이었고 ▲사무실에 출근하며 근무했으며 ▲대표의 직접적인 대면 지시를 따랐을 뿐이다. 범죄와 연관된 별도의 대가를 받은 사실도 없다. 통상적인 경리 업무의 일환으로 통장을 개설한 A씨에게 '범죄의 고의'를 묻기는 어렵다는 것이 법조계의 중론이다. A씨 입장에서는 월급을 주는 대표의 지시를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셈이다.
만약 당신이 A씨라면? '이렇게' 대응해야 산다
A씨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당황하지 말고 차분한 대응이 중요하다. 우선 경찰의 금융거래정보 제공 통보는 수사의 일부일 뿐, 그 자체로 당신이 피의자라는 의미는 아니다.
추은혜 변호사(법률사무소 더든든)는 "당시 근무 사실을 입증할 근로계약서, 급여 이체 내역, 상사의 업무 지시를 증명할 이메일이나 메신저 대화 등을 미리 확보해두라"고 조언했다. 이런 객관적 증거들이 '나는 범죄인 줄 몰랐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가장 강력한 무기다.
경찰 조사에서는 아는 사실만 명확히 진술하고, 추측성 답변이나 '범죄를 의심했던 것 같다'는 식의 불리한 진술은 피해야 한다.
만약 참고인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된다면, 즉시 조사를 중단하고 변호사를 선임해 법적 조력을 받는 것이 안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