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내밀며 "나가라"…'아름다운 이별'의 배신
달력 내밀며 "나가라"…'아름다운 이별'의 배신
사직서 쓰라더니, 새 직원 채용 후 "오늘부터 나오지 마"

병원장이 직원에게 폭언과 함께 사직을 강요하고, 약속된 퇴사일 하루 전 새 직원을 채용하며 일방적으로 해고했다. / AI 생성 이미지
불 꺼진 병원에서의 고성으로 시작된 압박. 원장은 "우리와 맞지 않는다"며 퇴사 날짜를 강요하고, 약속된 퇴사일 하루 전날 "오늘부터 출근 면제"를 통보했다.
출근하니 내 자리엔 이미 새 직원이 앉아 있었고, 짐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름다운 이별'을 말하던 원장의 잔혹한 두 얼굴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우리와 맞지 않다"… 달력 내밀며 시작된 '사직 쇼'
사건은 지난해 12월 19일, 불 꺼진 병원에서 시작됐다. 병원 원장은 동료 직원이 보는 앞에서 직원 A씨에게 강한 고성과 질책을 쏟아냈다.
공포의 시간은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원장은 A씨를 자신의 사무실로 1:1로 호출했다. 밀폐된 공간에서 원장은 "우리와 잘 맞지 않는다", "내가 굳이 더 이상 억지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며 사실상 해고를 암시했다.
A씨가 계속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원장은 말을 끊고 달력을 내밀었다. 1월 17일, 24일, 31일 중 하나를 고르라는 것이었다. 기준을 묻자 원장은 "토요일 기준"이라고 짧게 답했다.
결국 A씨가 1월 31일을 택하자, 원장은 사직서 작성을 반복적으로 종용했다. "내용은 이렇게 적어라", "1월 31일로 적어라", "미리 작성해 달라"는 요구가 쏟아졌다.
A씨가 "그만두겠다는 말을 들으려고 일부러 그랬냐"고 묻자, 원장은 "매일 해고를 고민했다"고 답했다. 이 모든 과정은 '권고사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내 자리에 앉은 새 직원, 바닥에 나뒹구는 내 짐
원장의 계획은 치밀했다. A씨가 사직서를 쓴 지 불과 8일 만인 12월 28일, 병원은 A씨의 자리를 대체할 새 직원 채용 공고를 올렸다. 새 직원은 1월 12일부터 출근을 시작했지만, A씨가 쉬는 날에만 출근하는 방식으로 A씨만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비극은 약속된 퇴사일 하루 전인 1월 30일에 터졌다. 출근한 A씨가 옷도 갈아입기 전, 원장은 그를 호출해 "새 직원이 오늘부터 출근했다. 오늘부터 출근을 면제해 주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A씨가 "왜 미리 말 안 했냐"며 항의하자, 원장은 "마지막에 안 오는 경우가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까먹었다"는 황당한 변명을 늘어놨다. 그 순간, A씨의 자리에는 이미 새 직원이 앉아 있었고, 사물함도 비워져 A씨의 짐은 바닥에 놓여 있었다.
직후 A씨는 병원 단체 채팅방에서 강제로 퇴장당했다. 원장은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합의한 거죠?",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A씨는 다음 날인 1월 31일, "합의가 아니다"라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지만 원장은 답하지 않았다.
변호사들 "명백한 부당해고…'합의' 유도에 속지 말아야"
법률 전문가들은 A씨의 사례가 형식만 사직일 뿐, 실질은 '부당해고'에 해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입을 모은다.
홍대범 변호사는 "근로자가 계속 일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음에도 원장이 말을 끊고 특정 날짜를 고르라고 압박한 점은 '사직서 제출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을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원장이 "합의한 거죠?"라는 말을 반복한 것에 대해 "역설적으로 본인의 강압 행위를 감추고 '합의'로 포장하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권장안 변호사 역시 1월 30일의 '출근 면제' 통보에 주목했다. 그는 "사용자가 근로 제공을 배제하고 관계 종료를 실행한 날이 1월 30일이라는 주장과 연결될 수 있다"며 "이 경우 그날 해고가 있었다는 프레임으로 부당해고 구제를 시도할 여지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또한 근로기준법상 해고는 사유와 시기를 '서면'으로 통지해야 하는데, 이 절차를 지키지 않은 것 역시 해고의 효력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있는 지점이다.
변호사들은 공통적으로 A씨가 원장의 '합의'라는 유도에 말려들지 말고, 일련의 과정이 담긴 증거(녹취, 카톡, 채용 공고 등)를 확보해 3개월 내에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제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