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세금 2.5억 떼먹고…집주인은 '신탁' 뒤에 숨어, '내 돈으로' 전세 살았다
내 전세금 2.5억 떼먹고…집주인은 '신탁' 뒤에 숨어, '내 돈으로' 전세 살았다
전세사기 피해자의 분노의 추적기, '신탁부동산'이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히다. 법원은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2.5억 전세사기 피해자가 잠적한 집주인을 찾아냈지만, 집주인의 새 전세보증금은 '신탁' 부동산 문제로 압류가 어려웠다./챗 지피티 생성 이미지
2억 5,000만 원의 전세금을 떼인 것도 분통 터지는데, 그 집주인이 내 돈으로 다른 아파트에서 전세 사는 것을 알게 됐다면?
한 전세사기 피해자가 채무자의 또 다른 전세보증금을 압류하려다 '신탁'이라는 복잡한 법률의 덫에 걸렸다.
오피스텔 전세 계약이 끝났지만, 임대인 A씨는 보증금 2억 5,000만 원을 돌려주지 않고 그대로 잠적했다.
기나긴 소송 끝에 승소 판결을 받아낸 임차인 B씨. 하지만 A씨는 모든 연락을 피하며 법의 심판마저 비웃는 듯했다. B씨는 포기하지 않고 A씨의 재산을 추적했고, 마침내 기가 막힌 사실을 알아냈다.
내 돈 떼먹고 유유히…뻔뻔한 집주인의 이중생활
채무자 A씨는 다른 아파트에 보증금 2억 1,500만 원을 내고 버젓이 세입자로 살고 있었다. B씨의 피 같은 돈을 깔고 앉아 자신의 안락한 보금자리를 마련한 셈이다.
B씨는 즉시 A씨의 새 전세보증금 중 대출금을 제외한 약 1억 원을 되찾기 위해 '채권압류 및 추심명령'이라는 칼을 빼 들었다. 내 채무자(A씨)가 다른 사람(A씨의 새 집주인)에게 받을 돈을 내가 대신 받게 해달라는 법적 절차였다.
하지만 B씨의 추적은 '신탁부동산'이라는 예상치 못한 암초에 부딪혔다. A씨가 사는 아파트의 등기부등본에는 집주인이 개인이 아닌 증권사, 즉 신탁회사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신탁'이라는 마법의 방패, 진짜 집주인은 누구?
신탁이란 부동산 소유권을 신탁회사에 맡겨 관리하게 하는 제도다. 이 때문에 A씨에게 보증금을 돌려줘야 할 진짜 집주인이 누구인지 가리는 것부터가 난관이 됐다. 더욱 기막힌 것은 A씨의 전입신고일과 아파트 소유권이 원래 주인에게서 신탁사로 넘어간 날짜가 2023년 6월 4일로 똑같았다는 점이다.
원래 세입자는 집주인이 바뀌어도 새 집주인에게 “나 여기 세입자요”라고 주장할 권리, 즉 '대항력'을 갖는다. 하지만 이 대항력은 전입신고 다음 날 0시부터 생긴다. A씨의 경우 대항력이 생기기 전에 집주인이 바뀌어버려, 법적으로 보증금을 돌려줄 의무가 원래 주인에게 있는지, 아니면 신탁사에 있는지 불분명해진 것이다. A씨는 이 법의 허점을 교묘히 파고들어 자신의 보증금을 안전한 방패 뒤에 숨긴 셈이다.
법조계의 묘수, '쌍끌이 압류'로 구멍을 막아라
이 복잡한 매듭을 풀기 위해 법률 전문가들은 '쌍끌이' 전략을 제시했다. 원래 집주인(위탁자)과 신탁사(수탁자) 모두를 '제3채무자'로 묶어 동시에 압류를 신청하라는 것이다.
이충호 변호사(HB & Partners)는 “둘 모두를 제3채무자로 지정하면 법원의 결정문이 양측에 모두 전달된다”며 “이를 통해 둘 중 누구라도 A씨에게 보증금을 내주는 것을 막아 돈이 빠져나갈 구멍을 원천 차단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대법원 판례(대법원 2012다33174 판결)에 따르면 신탁등기가 되면 소유권은 수탁자인 신탁사에 완전히 넘어가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법적 임대인은 신탁사일 가능성이 높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그물망을 촘촘히 짜야 한다는 의미다.
두 개의 전쟁, 고통스러운 '예약'만 걸어뒀다
그렇다면 B씨는 당장 1억 원을 손에 쥘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답은 '아니오'다. B씨가 확보한 것은 A씨의 계약이 끝났을 때 보증금을 돌려받을 '권리'일 뿐, 계약을 마음대로 끝낼 '지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A씨의 전세 계약이 2027년 6월에 끝난다면, B씨는 그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지금의 압류는 2년 뒤를 위한 '고통스러운 예약'인 셈이다.
결국 B씨는 A씨가 보증금을 떼먹은 기존 오피스텔의 강제경매를 진행하는 동시에, 2년 뒤를 기약하며 또 다른 보증금을 묶어두는 '두 개의 전쟁'을 치르게 됐다. 이번 사건은 전세사기범들이 법의 허점을 악용하는 현실과 함께, 피해자를 두 번 울리는 신탁 제도의 허점이라는 사회적 과제를 동시에 던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