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 줬는데…돌변한 회사 “넌 근로자 아니야” 소송, 왜?
퇴직금 줬는데…돌변한 회사 “넌 근로자 아니야” 소송, 왜?
형사처벌 피하려 퇴직금 지급 후 '선례 차단' 위해 소송전 돌입

회사가 용역 노동자에게 퇴직금 지급 후 '근로자가 아니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 AI 생성 이미지
용역계약으로 3년간 일하고 노동청을 통해 퇴직금을 받아낸 A씨. 그런데 회사가 돌연 '당신은 근로자가 아니었다'며 소송을 걸어왔다.
전문가들은 회사가 다른 동료들의 연쇄적인 퇴직금 청구를 막기 위해, 형사처벌을 피한 뒤 전략적으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퇴직금을 둘러싼 사용자와 근로자 간의 이 기묘한 법정 다툼의 내막을 취재했다.
퇴직금은 '미끼'? 처벌 피하자 태세 전환한 회사
3년간 용역계약으로 근무한 A씨는 노동청 진정을 통해 밀린 퇴직금을 받았다. 회사에 대한 형사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처벌불원서'까지 써 주었다.
하지만 평화는 잠시였다. A씨에게 돌아온 것은 '당신은 근로자가 아니었다'는 차가운 내용증명과 법원의 소장이었다. A씨와 유사한 형태로 일하는 동료가 많은 회사에서 퇴직금을 받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해 법무법인 우선 이민철 변호사는 “회사가 퇴직금을 지급한 것은 질문자님의 근로자성을 순순히 인정했다기보다는, 근로기준법 위반에 따른 형사처벌을 피하기 위해 합의금 명목으로 지급하고 처벌불원서를 받으려는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라고 분석했다.
형사 처벌이라는 급한 불을 끄자, 이제 다른 직원들에게 미칠 파장을 막기 위해 민사소송으로 칼을 빼들었다는 것이다.
법원 판단 뒤집힐까…“스스로 준 퇴직금이 발목 잡을 것”
A씨의 가장 큰 불안은 '혹시 법원에서 노동청의 판단이 뒤집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법조계 전문가들은 노동청의 행정적 판단이 법원을 법적으로 구속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법원은 계약서의 명칭이 '용역'이라도, 실질적으로 사용자의 지휘·감독을 받았는지, 근무 시간과 장소가 정해져 있었는지 등을 대법원 판례에 따라 독자적으로 다시 심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수의 전문가들은 회사가 이미 퇴직금을 지급한 사실이 A씨에게 매우 유리한 증거가 된다고 입을 모은다.
법무법인(유한) 엘케이비평산 정진열 변호사는 “퇴직금 지급은 회사 스스로 근로관계를 사실상 인정한 행위로 법원에서 유력한 간접 증거로 기능할 수 있고, 회사가 이를 번복하려면 상당한 입증 부담을 지게 됩니다”라고 설명했다.
회사가 '근로자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려면, 근로자에게만 지급 의무가 있는 퇴직금을 왜 스스로 지급했는지부터 법원에 설득력 있게 해명해야 하는 셈이다.
“대법원까지 갈 각오”…유사 사례 막기 위한 ‘장기전’ 예고
설령 1심에서 A씨가 승소하더라도 싸움이 쉽게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회사 입장에서는 이번 판결이 향후 다른 직원들의 퇴직금 청구로 이어지는 '선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법무법인 강남 류재연 변호사는 “질문자님의 글에 언급되었듯 회사 내에 비슷한 형태의 용역계약 근무자가 많기 때문에, 회사는 이번 판결이 선례가 되어 다른 직원들도 퇴직금을 청구하는 대규모 사태를 막으려 할 것입니다”라고 내다봤다.
그는 이어 “따라서 대법원까지 갈 각오로 장기전을 유도하며 항소할 확률이 큽니다”라고 전망했다.
다수 변호사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1심 재판에만 통상 6개월에서 1년이 걸리고, 항소와 상고를 거듭할 경우 전체 소송 기간이 2~3년을 훌쩍 넘길 수도 있다. 회사로서는 다른 직원들의 추가 청구라는 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해 소송을 끝까지 끌고 갈 동기가 충분하다는 분석이다.
승패의 열쇠, '말'보다 강한 '기록'을 확보하라
결국 이 지루한 싸움의 승패는 '실질적인 종속 관계'를 입증할 구체적인 증거에 달렸다. 변호사들은 한목소리로 법원이 계약서의 형식보다 실제 근무 형태를 중시한다고 강조한다.
공동법률사무소 온기 권장안 변호사는 “'말'보다 기록이 강합니다”라고 단언하며, “예컨대 업무지시 메시지, 출퇴근/근태자료, 일정표, 업무배정 내역, 회의자료, 평가·경고·패널티 자료, 회사 시스템 계정 부여 및 사용 로그, 회사가 제공한 장비·법인카드·업무비 정산자료 등은 종속성 판단에 직접 연결되는 편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모두 근로자성을 판단하는 핵심 증거들이다. 회사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사업소득세를 떼거나 4대 보험에 가입시키지 않았더라도, 이런 형식적 사정만으로 근로자성이 쉽게 부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대법원의 확립된 판례다.
홀로 노동청의 벽을 넘었던 A씨. 이제는 회사가 사활을 걸고 덤비는 법정에서, 차곡차곡 쌓아온 ‘기록’을 무기로 더 길고 힘든 싸움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