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은 유효, 보증금은 위험"…신탁부동산의 두 얼굴
"계약은 유효, 보증금은 위험"…신탁부동산의 두 얼굴
집주인 아닌 사람과 계약? 변호사들, "계약 자체는 유효하지만 신탁사에 대항 못해"

신탁사 소유 부동산을 임대인과 계약한 경우, 신탁사 동의가 없으면 대항력이 없어 보증금을 보호받기 매우 어렵다. / AI 생성 이미지
임대인과 계약했는데 알고 보니 신탁사 소유? 계약 당시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는 세입자.
법률 전문가들은 계약 자체는 유효할 수 있으나, 신탁사 동의가 없었다면 대항력이 없어 보증금 보호가 매우 어렵다고 경고한다. 신탁 사실을 숨긴 임대인과 중개사를 상대로 사기 고소와 손해배상 청구를 즉시 준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계약은 유효"…그러나 반쪽짜리 권리
정상 계약인 줄 알았는데 등기부등본을 떼 보니 주인이 신탁회사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사람은 온데간데없다. 이런 황당한 경우, 내가 맺은 임대차 계약은 휴지조각이 되는 걸까?
놀랍게도 법률 전문가들은 “계약 자체는 유효하다”고 말한다. 법무법인 대환 김상훈 변호사는 “임대인에게 임대목적물에 대한 소유권이나 임대 권한이 없더라도 임대차계약 자체는 당사자 사이에서 유효하게 성립합니다”라고 설명했다. 계약서에 서명한 상대방에게는 여전히 계약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유효’라는 말이 세입자의 권리를 온전히 보장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진짜 주인인 신탁회사가 이 계약을 인정하지 않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법무법인(유한) 엘케이비평산 정진열 변호사는 “수탁자의 사전승낙(또는 사후승인) 없이 위탁자(또는 제3자) 명의로 체결된 임대차는 수탁자에게 효력을 주장하기 어렵고, 임차인은 해당 부동산에 대해 대항력·우선변제권을 취득하지 못하게 됩니다”라고 경고했다.
즉, 계약은 살아 있지만, 주택임대차보호법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행사할 수 없는 ‘반쪽짜리 권리’로 전락할 수 있다.
"무단 점유자입니다, 집 비우세요" 최악의 시나리오
신탁회사가 세입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세입자는 법적으로 ‘무단 점유자’가 될 수 있다.
법무법인 랜드로 신지수 변호사는 “신탁사는 의뢰인을 '무단 점유자'로 보아 퇴거를 명할 수 있습니다. 즉, 법적으로 보호받는 임차인으로서의 대항력이 없습니다”라고 단언했다. 보증금도 돌려받지 못한 채 길거리로 나앉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월세는 계속 내야 할까? 이 또한 애매한 문제다.
법무법인 쉴드 이진훈 변호사는 “월세는 권리귀속이 불명확하므로 신탁사 확인 전에는 내용증명으로 지급유보 의사를 밝히고, 채권자 불확지에 따른 변제공탁(민법 제487조)을 검토하시길 권합니다”라고 조언했다.
섣불리 월세를 냈다가 나중에 신탁사로부터 부당이득 반환 청구를 당하는 등 이중고를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기꾼 임대인·부실 중개사, 법의 심판대에 세우려면
세입자를 절망에 빠뜨린 계약 당사자와 공인중개사에게는 어떤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민·형사상 책임을 동시에 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법무법인 명륜 오지영 변호사는 “형사적으로는 계약 상대방이 신탁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숨기고 마치 본인이 임대 권한이 있는 것처럼 속여 보증금과 월세를 수령한 것이라면 사기죄에 해당합니다”라고 밝혔다.
중개사의 책임도 무겁다. 정진열 변호사는 “공인중개사는 권리관계(신탁 포함)를 확인·설명하고 근거자료(신탁원부 등)를 제시할 의무가 있고, 신탁부동산 임대차에서 그 법적 의미(수탁자 동의 없으면 대항 불가 등)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으면 손해배상책임(및 공제책임)이 인정될 수 있습니다”라고 지적했다.
법무법인 태희 민경남 변호사는 “계약 당시 부동산이 신탁 상태라는 사실과 그에 따른 법적 위험성을 전혀 고지하지 않은 중개사와 임대인을 상대로 형사상 사기죄 및 공인중개사법 위반 혐의로 강력한 형사 고소를 진행하여 압박할 수 있습니다”라며 신속한 법적 조치를 촉구했다.
내 보증금 지킬 '골든타임', 지금 당장 해야 할 일
뒤늦게 신탁 사실을 알았다면 한시가 급하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숨겨진 권리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법률사무소 반석 최이선 변호사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구청이나 등기소에서 '신탁원부'를 발급받아 임대 권한에 관한 구체적인 약정 내용을 확인하는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신탁원부를 통해 임대 권한이 누구에게 있고, 어떤 조건이 붙어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대응의 첫걸음이다.
이후에는 증거를 확보하고 법적 대응에 즉시 착수해야 한다. 다수의 변호사들은 계약서,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 대화 기록 등을 확보한 뒤 곧바로 내용증명을 발송하고, 사기죄 고소와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동시에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신탁 사기는 초기 대응이 늦어질수록 가해자가 재산을 빼돌릴 시간을 벌어 주는 셈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법리만큼이나 신속하고 정밀한 대응이 내 소중한 보증금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