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망치는 X” 2차 가해…가족에 두 번 찢긴 성폭행 상처, 죗값 물을 수 있나
“남자 망치는 X” 2차 가해…가족에 두 번 찢긴 성폭행 상처, 죗값 물을 수 있나
초등생 시절 성폭행 피해 후 가족에게 폭언·폭행·성추행 등 2차 피해…수십 년 묵은 상처, 법의 심판대에 올리기 위한 조건은?

어린 시절 성폭행과 가족의 2차 가해로 고통받던 여성이 수십 년 만에 법적 대응을 모색한다. / 셔터스톡
성폭행보다 아팠던 가족의 2차 가해…수십 년 묵은 상처, 법의 심판대에 세울 수 있을까
"남자 신세 망치는 X." 끔찍한 성폭행보다 더 아팠던 건, 나를 지켜주지 않은 가족이 던진 잔인한 한마디였다.
수십 년간 곪아 터진 상처를 안고 사는 한 여성이 가족에게 법의 심판을 내릴 수 있을지 물었다. 전문가들은 '두 개의 높은 벽'을 넘어야 한다고 답했다.
"네가 꼬셨지"…성폭행보다 잔인했던 가족의 '두 번째 가해'
최근 한 법률 상담 플랫폼에 A씨의 글이 올라왔다. 그녀는 “초등학생 때 성폭행을 당했다”는 고백으로 지옥 같던 기억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진짜 비극은 그 이후에 시작됐다.
가족 중 한 사람은 사건을 알게 된 뒤 A씨를 골목으로 끌고 가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산부인과 검사를 받고 고통에 우는 어린 아이에게 꿀밤을 때리며 “남자 신세 망치는 X”, “남자를 꼬셨다”는 폭언을 퍼부었다. 심지어 다른 가족에게는 성추행까지 당해야 했다.
이 모든 기억은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A씨의 삶을 옭아맸다. 그는 “두 사람 덕분에 나는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약 먹은 지 몇 년 됐다”며 “억울해서라도 그 사람들에게 보상을 받고 싶은데 가능할까”라고 물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가해자들에게 법의 심판을 내리고 싶다는 절박한 호소였다.
"첫 번째 벽, '공소시효'…수십 년의 시간은 누구의 편인가?"
A씨의 사연에 변호사들은 ‘공소시효’가 핵심 쟁점이라고 입을 모았다. 희망은 있었다. 조기현 변호사(법무법인 대한중앙)는 “초등학생 때 성폭행, 성추행을 당한 사안이라면 공소시효가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형사고소가 가능하다”고 긍정적으로 봤다.
현행 성폭력처벌법이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의 공소시효를 피해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정지시키기 때문이다. 김연수 변호사(법무법인 시우) 역시 “미성년자일 때 성범죄 피해를 당한 경우, 성인이 될 때까지는 공소시효가 진행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민경철 변호사(법무법인 이엘)는 “13세 미만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는 2010년 이후이므로 그 당시 공소시효가 완성되지 않은 사건이라야 가능하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즉, 범행이 법 개정 이전에 일어났고, 과거 법률에 따른 공소시효가 이미 지났다면 처벌이 어려울 수 있다는 지적이다. 수십 년이라는 시간이 과연 누구의 편에 서 있을지, 법리적 검토가 치열하게 필요한 대목이다.
"두 번째 벽, '증거'…나의 기억은 어떻게 법을 설득하나"
공소시효의 벽을 넘더라도 ‘증거’라는 또 다른 산이 버티고 있다. 오래전 일이라 물증을 찾기 어려운 성범죄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는 피해자의 일관되고 구체적인 진술이다.
허유영 변호사(법무법인 안양)는 “성범죄의 경우 증거는 A씨의 진술이 직접 증거”라며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들로 피해자 진술 신빙성을 높여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A씨가 수년간 우울증 치료를 받은 정신과 진료기록, 상담 기록, 당시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던 친구나 다른 가족의 증언 등이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할 강력한 간접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이는 성범죄 사건을 심리할 때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대법원 2018도7709 판결)의 취지와도 맞닿아 있다. 법원은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차례 판시한 바 있다.
법적 대응은 형사 고소와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두 가지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전문가들은 형사 고소를 먼저 진행해 유죄 가능성을 높인 뒤, 이를 근거로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투 트랙’ 전략이 유리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소송이 부담스럽다면 변호사를 통해 가해자들과 사과 및 배상을 조건으로 합의를 시도하는 방법도 있다.
수십 년 묵은 상처를 법의 심판대에 올리는 여정은 결코 쉽지 않다. 공소시효와 증거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또다시 좌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시작'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다. 흩어진 기억의 조각이라도 붙들고 법률 전문가의 문을 두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나를 파괴했던 과거와 싸우고, 빼앗겼던 존엄을 되찾는 첫걸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A씨의 용기 있는 질문은, 어쩌면 그 첫걸음을 내디딘 것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