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관계 녹음파일로 협박했는데…성범죄가 아니라고요?
성관계 녹음파일로 협박했는데…성범죄가 아니라고요?
녹음파일은 '일반 협박'
성폭력처벌법의 사각지대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자신을 고소한 내연녀에게 성관계 소리가 담긴 녹음파일을 전송하며 가족과 직장에 폭로하겠다고 협박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피고인 A씨.
법원은 A씨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그런데 이 사건 판결문을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가장 치명적이고 악의적인 수단이었던 '성관계 녹음파일'을 이용한 협박에 대해, 이른바 '성범죄'로 불리는 성폭력처벌법이나 사이버 괴롭힘을 다루는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는 아예 기소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고인에게 적용된 혐의는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보복협박등)과 일반 협박, 두 가지뿐이었다.
왜 성범죄 조항이 빠졌을까.
여기에는 현행법의 허점과, 이를 돌파하기 위한 검찰의 전략이 숨어 있다.
동영상은 처벌, 녹음파일은 예외?… 성폭력처벌법의 빈틈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혐의는 성폭력처벌법 제14조의3 '촬영물 등 이용 협박죄'다.
이 조항은 성적 수치심을 일으킬 수 있는 '촬영물'로 사람을 협박하면 1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엄하게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A씨가 보낸 것이 동영상이나 사진이 아니라 '음성 녹음파일'이었다는 점이다.
현행법상 이 조항이 적용되는 대상은 카메라 등 기계장치로 신체를 직접 찍은 촬영물에 한정된다.
즉, 눈으로 보는 영상물이 아닌 귀로 듣는 녹음파일은 아무리 성적 수치심을 주더라도 법 조문상 촬영물에 해당하지 않는다.
디지털 성범죄 수법은 나날이 진화하고 있고, 녹음파일 역시 피해자에게 치명적인 정신적 고통을 안긴다.
그럼에도 현행법은 이를 가중처벌 대상에 포함하지 못한 채 사각지대를 남겨두고 있다.
정보통신망법 대신 '특가법'을 꺼내 든 이유
그렇다면 A씨가 8차례에 걸쳐 불안감을 유발하는 폭로성 문자메시지를 반복해서 보낸 행위를, 정보통신망법(공포심·불안감을 주는 문구의 반복 전송) 위반으로 처벌할 수는 없었을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에도 결정적인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반의사불벌죄'다.
반의사불벌죄란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는 죄'를 말한다.
정보통신망법 위반죄와 형법상 단순 협박죄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실제로 이 사건 재판이 진행되던 2024년 5월 14일, 피해자는 A씨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혔다.
그 결과 재판부는 A씨의 일반 협박 혐의에 대해 공소를 기각했다. 재판 자체가 성립하지 않아 처벌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만약 검찰이 정보통신망법 위반으로 기소했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결국 검찰은 반의사불벌죄가 적용되지 않는 특가법 제5조의9 '보복협박죄'를 적용해 기소했다.
보복협박죄는 단순 협박보다 형량이 무겁고, 수사기관에 대한 고소 등 정당한 형벌권 행사를 방해하는 중대 범죄로 보기 때문에 피해자의 합의 유무와 상관없이 처벌이 가능하다.
재판부 역시 피해자의 처벌불원 의사에도 불구하고 유죄를 선고했다.
경찰로부터 보복 범죄를 경고받은 직후, A씨가 곧바로 성관계 녹음파일을 보내며 협박한 정황을 볼 때 '보복 목적'이 뚜렷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재판부는 검찰이 기소한 특가법상 보복협박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그러나 시각적 촬영물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성적 수치심을 악용한 보복 범죄가 성범죄 테두리 밖에서 다뤄져야 하는 현실은, 현행법이 진화하는 디지털 범죄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과제를 남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