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칼'의 증명…피해자 진술, 법정 세우나
'보이지 않는 칼'의 증명…피해자 진술, 법정 세우나
흉기 없는 특수협박 공방…법조계 "진술의 일관성·구체성이 관건"

쿠팡 배송원으로 위장해 현관문까지 접근해 흉기로 피해자를 위협한 남성이 재판에 넘겨졌다. / AI 생성 이미지
"쿠팡 배송원입니다." 2026년 4월 12일 새벽, 한 남성이 연쇄적으로 남의 집 문을 두드렸다. 그는 차량을 부수려 하고, 흉기를 든 채 여러 가구의 공동현관에 침입했으며, 급기야 배송기사로 위장해 피해자를 위협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러나 범행에 쓰였다는 '칼'은 어디에도 없다. 피고인의 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는 피해자의 진술뿐이다. 법정에서 '보이지 않는 칼'의 존재를 두고 치열한 공방이 예고됐다.
하룻밤의 광기…차량 파손부터 '쿠팡맨 위장'까지
공소사실에 따르면, 악몽은 2026년 4월 12일 새벽 1시 25분경 시작됐다. 피고인은 주차된 차량을 주먹으로 네 차례 내리쳤지만 파손에는 이르지 못해 재물손괴미수 혐의를 받는다.
그의 범행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 대담해졌다. 새벽 4시 45분, 그는 칼날 길이 약 11cm의 과도를 소지한 채 한 공동현관에 침입해 피해자 집 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10분 뒤 다른 집에서는 비밀번호를 풀지 못해 미수에 그쳤고, 7분 뒤인 5시 2분에는 또 다른 집에서 자신을 쿠팡 배송원으로 속여 현관문 앞까지 접근했다.
범행은 위층 주민인 척하던 피고인이 도망치는 피해자를 뒤쫓아가며 절정에 달했다. 그는 "2층으로 올라가 봐"라고 말하며 바지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는 시늉을 해 피해자를 위협한 혐의(특수협박)를 받고 있다.
하지만 피고인은 법정에서 "흉기를 소지한 사실이 없다"며 '특수' 혐의의 핵심 전제를 전면 부인했다. 실제로 수사 과정에서 칼이나 칼집은 발견되지 않았고, CCTV에도 그가 흉기를 들고 있는 모습은 포착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물증이냐, 진술이냐…'보이지 않는 칼'의 증명력
재판의 무게추는 결국 법원이 '보이지 않는 칼'의 존재를 인정할지 여부에 쏠린다. 법조 전문가들은 직접적인 물증이 없어도 유죄 선고가 가능하다는 데 의견을 모은다.
법률사무소 조이 윤관열 변호사는 "형사재판에서는 반드시 흉기 자체가 압수되어야만 유죄가 인정되는 것은 아니며, 피해자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되며 당시 정황과 부합한다고 판단되면 그 진술만으로도 사실이 인정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법원이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기준에 대해 법무법인 헌정 송인혁 변호사는 "법원은 피해자 진술이 ① 수사기관부터 법정까지 일관되고, ②진술 내용이 구체적이며, ③허위 진술의 동기가 없고, ④객관적 정황과 부합하는 경우 높은 신빙성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즉, 피해자 진술이 얼마나 일관되고 구체적인지가 유무죄를 가를 수 있다는 의미다.
이에 피고인 측은 피해자 진술의 신뢰도를 깨는 데 집중해야 한다. 법무법인 우선 이민철 변호사는 "사건 직후 112 최초 신고 내용에 칼집이나 흉기에 대한 언급이 언제 어떻게 등장했는지 등 객관적인 간접 정황들을 치밀하게 분석하여, 피해자 진술에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는 것이 적절한 방어 전략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전면 부인'이냐 '투트랙 전략'이냐…집행유예의 갈림길
만약 법원이 흉기 소지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혐의는 '특수주거침입'과 '특수협박'에서 '특수'가 빠진 일반 주거침입과 협박으로 바뀌어 처벌 수위가 크게 낮아진다. 그러나 '특수' 혐의가 인정되더라도 집행유예의 길이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니다.
법무법인 리온 손현명 변호사는 "실제 상해가 발생하지 않았고, 재물손괴도 미수에 그쳤으므로 초범이고 피해자들과 상당 부분 합의한다면, 집행유예를 받을 가능성은 충분히 남아 있다"고 분석했다.
전과 여부, 진지한 반성, 그리고 피해자들과의 합의가 중요한 양형 요소라는 점은 여러 변호사가 공통으로 강조하는 지점이다. 하지만 섣부른 혐의 부인은 오히려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경고도 잇따른다.
법무법인 청목 김정호 변호사는 "범죄사실에 의하면 죄질이 가볍지 않은 사안으로 보이는데, 소지 여부에 대해 부인하는 취지로 다투다가 혐의가 인정될 경우 초범에 대해서도 실형이 선고될 수 있는 사안으로 보인다"고 우려를 표했다.
결국 법조계의 조언을 종합하면, 흉기 소지 여부를 법리적으로 다투면서도 동시에 피해자들과의 합의를 통해 선처를 구하는 '투트랙 전략'이 가장 현실적인 해법으로 보인다.
법무법인 도모 고준용 변호사는 "피해자 진술 탄핵을 통한 유죄 입증 차단 전략과 더불어 피해자 합의를 병행해 실형 위험을 낮추는 방향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