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가 우리집 동·호수까지 아는데…" 합의서에 '이 조항' 빠지면 위험, 변호사의 경고
"가해자가 우리집 동·호수까지 아는데…" 합의서에 '이 조항' 빠지면 위험, 변호사의 경고
차 피해 막는 '접근금지·비밀유지·위약벌' 3종 세트 필수…'민·형사상 일체 책임 포기'는 독소 조항

불법촬영 피해자가 합의 시 2차 피해를 막으려면, 합의서에 접근금지, 비밀유지, 위약벌 조항을 명시해야 한다. /AI 생성 이미지
불법촬영 가해자와의 합의를 앞둔 피해자 A씨. 자신의 모든 신상이 노출된 상황에 2차 가해의 공포에 휩싸였다.
합의서 작성이 또 다른 족쇄가 될까 두려웠던 그녀에게, 형사법 전문 김경태 변호사는 "합의서는 가해자를 막는 '방패'가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접근금지부터 위약벌 조항까지, 피해자의 안전을 지키는 법적 장치를 촘촘히 설계하는 방법을 알아본다.
"합의서에 주소를 또 써야 하나요?"… 끝나지 않은 공포
A씨의 기나긴 싸움이 끝나는 듯했다. 성관계 중 몰래 영상을 촬영하고 유포까지 한 가해자는 결국 재판에 넘겨졌다. 터무니없는 합의금을 제시하며 뻔뻔한 태도를 보이던 가해자 측이, 결국 A씨가 요구한 금액으로 합의하자며 연락해왔다.
합의금은 이미 변호사 사무실 계좌에 입금된 상태. 이제 합의서에 도장만 찍으면 지긋지긋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A씨는 펜을 들 수 없었다. 가해자는 A씨의 외모부터 이름, 연락처는 물론, 아파트 동·호수까지 낱낱이 알고 있었다. 합의서에 내 이름과 주소를 다시 한번 명기해야 한다는 사실이 숨 막히는 공포로 다가왔다.
이 종이 한 장이 과연 악연의 마침표가 될까, 아니면 또 다른 위협의 초대장이 될까. A씨는 "합의를 끝으로 그 사람과 완벽히 연을 끊고 싶은데, 오히려 내 정보를 다시 확인시켜주는 꼴이 될까 봐 두렵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합의서는 방패"… 김경태 변호사가 제시한 '3가지 보호 장치'
A씨의 사연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2차 피해'의 공포를 여실히 보여준다. 가해자의 처벌을 위해 시작된 법적 절차가, 역설적으로 피해자를 끊임없이 불안에 떨게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막막한 상황에 놓인 피해자들에게 법률 전문가들은 "합의서는 포기 문서가 아니라, 피해자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대한변호사협회에 등록된 형사법 전문 김경태 변호사는 "피해자의 신상정보가 노출된 상황일수록 합의서에 보호 장치를 촘촘히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변호사가 제시한 핵심 보호 장치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비밀유지 및 접근금지' 조항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제3자에게 절대 유출할 수 없으며, 어떠한 수단으로도 피해자에게 연락하거나 접근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명시해야 한다. 공동법률사무소 문정의 한동국 변호사는 "피해자의 가족이나 주변인에게 연락하는 것까지 금지하는 내용을 포함해야 2차 피해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둘째, '위반 시 위약벌' 조항이다. 단순한 약속에 그치지 않도록, 합의 내용을 어길 시 강력한 페널티를 부과하는 것이다. 경찰대학 출신으로 여성청소년범죄수사팀장을 역임한 법률사무소 새율의 최성현 변호사는 "통상 합의금의 2배 이상을 위약금으로 설정해, 가해자가 합의 조항을 어길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셋째, '신상정보 기재 최소화'다. A씨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던 개인정보 노출 문제에 대해, 법무법인 신의 박지영 변호사는 "합의서에 피해자의 주민등록번호나 상세 주소를 전부 기재할 법적 의무는 없다"며 "가해자가 이름을 알고 있다면, 이름과 생년월일 정도만 기재하여 당사자를 특정하는 것만으로도 법적 효력은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이 문구'는 독소 조항… 절대 서명해선 안 되는 함정
피해자를 지키는 '방패' 조항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독소 조항'을 걸러내는 것이다. 변호사들이 가장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문구는 "본 합의로 민·형사상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와 같은 '포괄적 권리 포기' 조항이다.
이는 향후 예상치 못한 추가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피해자가 아무런 법적 대응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족쇄가 될 수 있다.
김경태 변호사는 "처벌불원 의사는 현재 진행 중인 특정 형사사건(사건번호 명시)에 한정한다고 명확히 해야 하며,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권은 별개임을 명시하거나 합의금에 모든 손해가 포함됨을 구체적으로 기재해야 분쟁을 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합의서 제출 시점도 매우 중요하다. 대법원 판례(대법원 2001. 12. 14. 선고 2001도4283 판결)에 따르면, 일단 수사기관이나 법원에 처벌불원 의사가 담긴 합의서가 제출되면, 이후 약속한 합의금이 지급되지 않더라도 이를 철회하기 어렵다. 따라서 반드시 합의금 전액이 입금된 것을 확인한 후에 합의서를 제출해야 한다.
최종 제출 전 반드시 확인할 것
성범죄 피해자에게 합의 과정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법을 제대로 활용하면 합의서는 피해자의 평온한 일상을 되찾아줄 든든한 방패가 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합의서 작성 시 반드시 변호사의 검토를 거쳐 ▲접근금지·비밀유지·2차 가해 금지 조항 포함 여부 ▲위약벌 등 실효성 확보 장치 여부 ▲포괄적 권리포기 등 독소 조항 배제 여부 ▲신상정보 노출 최소화 ▲합의금 수령 후 제출 원칙 준수 등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경태 변호사는 "힘든 시간을 거쳐 법적 절차의 마지막 단계에 이른 만큼,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고 자신의 권리를 지켜내야 한다"며 "합의서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법적 안전장치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