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만 말했습니다"…성범죄 피해자, 법정에서 두 번 우는 이유
"사실만 말했습니다"…성범죄 피해자, 법정에서 두 번 우는 이유
피해 사실 폭로가 '명예훼손'이 되는 현실, 법원은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공익성' 입증의 열쇠와 대법원 판례를 통해 해법을 짚어본다.

A씨가 성범죄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렸다가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했다. /챗 지피티 생성 이미지
"사실만 말했습니다"…성범죄 피해자, 법정에서 두 번 우는 이유
성범죄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렸다가 오히려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는 '2차 피해'의 딜레마가 법의 심판대에 올랐다.
대학 선배 A에게 끔찍한 일을 당한 후배 B씨. 억울함에 학과 동료들에게 피해 사실을 털어놓은 그의 용기는 '명예훼손'이라는 예기치 못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성범죄 피해자가 순식간에 또 다른 가해자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피해자를 옥죄는 명예훼손의 덫
B씨의 호소는 어쩌다 법의 심판대에 오르게 된 걸까. 우리 형법은 거짓말뿐 아니라 '진실을 말해도' 상대방의 사회적 평가를 떨어뜨리면 처벌하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두고 있다. 피해 사실을 알리는 당연한 행동이 범죄가 될 수 있다는 이 법의 아이러니는 수많은 피해자를 침묵하게 만든다.
피해를 증명하기도 벅찬 현실에서, 가해자의 추가 고소라는 '2차 가해'의 공포는 피해자의 입을 막는 족쇄가 된다.
'공동체를 위한 폭로'…법원이 내민 유일한 구명줄 '공익성'
다행히 법은 모든 문을 닫아두지 않았다. 형법 제310조는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고 명시하며 구명줄을 내민다.
최성현 변호사(법률사무소 새율)는 "성범죄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은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한 경고의 의미가 크다"며 "이는 다른 학과 구성원의 안전을 지키려는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므로 죄가 되지 않을(위법성 조각)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역시 "내부 비리 고발처럼 폭로 내용이 집단 전체의 이익과 관련이 깊고, 불특정 다수에게 무분별하게 전파한 것이 아니라면 공익성을 폭넓게 인정한다"는 판례를 통해, 공동체를 위한 폭로의 길을 열어두고 있다. 결국 B씨의 폭로가 사적인 복수심이 아닌, 공동체를 위한 행동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핵심인 셈이다.
가해자의 침묵, 반성인가 전략인가
상황을 뒤집어, 가해자 A가 B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지 않는다면 법원은 이를 어떻게 볼까. 자신의 성범죄 재판에서 '나는 피해자의 2차 가해마저 감수한 반성하는 사람'이라며 형량을 깎으려는 전략으로 쓰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법조계의 시선은 엇갈린다. 박상호 변호사(캡틴법률사무소)는 "진심으로 반성해 문제를 삼지 않았다면, 재판부에 이런 태도를 조심스럽게 어필해 유리한 판단을 끌어낼 여지는 있다"고 봤다.
반면 김지진 변호사(법무법인 리버티)는 "명예훼손 고소를 안 하는 것이 성범죄 형량을 깎아주는 결정적 이유가 되기는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가해자의 '침묵'이 여러 양형 요소 중 하나로 참고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감형을 보장하는 '프리패스'는 아니라는 분석이다.
"판사님, 저 탄원서는 거짓입니다!"…막판 뒤집기, '참고서면'이 답
재판 막바지, 피해자가 낸 '엄벌 탄원서'에 거짓 내용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끝난 변론을 다시 열어달라고(변론재개 신청) 외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정찬 변호사(법무법인 더신사)는 현실적인 방법으로 '참고서면'을 조언했다. 그는 "판결 선고 전이라면 판사가 참고서면을 검토할 가능성이 높다"며 "탄원서의 어떤 부분이 사실과 다른지 명확한 증거와 함께 제출해 판사의 오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판 막판, 진실을 향한 마지막 기회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