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윗사람도 아닌데, '판결을 내렸다'는 표현을 쓰는 게 맞나요?
판사가 윗사람도 아닌데, '판결을 내렸다'는 표현을 쓰는 게 맞나요?
[한글날 특집] 언론에서 당연하게 쓰이는 표현⋯'판결을' + '내렸다'
한 변호사가 쏘아올린 공 "이제라도 '판결했다'로 대체해야"
전문 국어학자, 그리고 변호사들과 함께 검토해 봤더니 "맞는 지적"

"판결을 내렸다" 기사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문장이지만,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왜 그런지 알아봤다. /연합뉴스⋅셔터스톡⋅편집=조소혜 디자이너
법원의 판결에 대한 내용을 담은 기사에서 당연하게 쓰이고 있는 표현이 하나 있다. "판결을 내렸다", "판결이 내려졌다"는 등 '판결' 뒤에 '내린다' 류의 동사가 붙는 문장이다. 실제 하루에도 수십번은 마주칠 수 있을 정도로 흔한 표현이고, 누적된 종합 포털 검색 결과도 100만건을 훌쩍 넘는다.
그런데 이러한 '내린다'는 표현을 "이제부터라도 쓰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최근 법조계에서 나왔다. 법무법인 이공의 양홍석 변호사는 "판사가 윗사람이고, 국민이 아랫사람처럼 느껴지게 하기 때문"이라며 "말이 생각을 바꾼다는 점에서 '판결을 내렸다' 대신 '판결했다'로 대체해야 한다"고 했다.
로톡뉴스는 전문 국어학자와 다른 변호사들과 함께 양 변호사가 쏘아올린 공을 검토해 봤다. 국어학자도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는 의견이었고, 다른 변호사들도 "이 지적에 찬성한다"고 했다.
양 변호사는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판결'과 '내린다'를 같이 쓰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했다. "①'위-아래 관계'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판사가 국민 위에 있다는 인식이 강화된다는 점"과 이러한 인식이 굳어지면 "②판결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을 방해할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①판사가 국민 위에 있다는 인식이 강화된다
다른 변호사들도 "이러한 지적에 찬성한다"고 했다.
원곡법률사무소의 최정규 변호사는 "실제 '판결했다'는 등 중립적으로 쓰는 게 적절해 보인다"며 "사소한 트집잡기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이런 표현부터 하나하나 세심하게 챙기는 게 맞는다"고 밝혔다. "마음 같아서는 시민들에게 판결문이 '올려지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법무법인 온세상의 설현섭 변호사도 "법정에서 판사들이 '판결을 내린다'고 하는 것은 들은 적이 없다"며 "언론도 권위주의의 폐습에서 벗어나 이러한 표현은 쓰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하다"고 평가했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윤지영 변호사 역시 같은 의견이었다. 나아가 "우리 법정은 재판부석이 높아서 판사가 내려다 보는 구조"라며 이러한 점 때문에 "비단 언어만의 문제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②판결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을 방해한다
"판결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을 방해할 수 있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변호사들은 "맞는 지적"이라고 했다.
더프렌즈 법률사무소의 이동찬 변호사는 "과거부터 권력자들은 시민들이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했다"며 "지금은 법이 이러한 글이라는 점에서 표현부터 시민들이 법을 더 쉽게 이해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게 맞는다"고 밝혔다.
그래야 "우리 법이 권력자들의 권위가 아니라 실생활의 도구라는 관점이 강조될 것"이라고 했다. 법무법인 시월의 류인규 변호사도 "전적으로 찬성한다"고 밝혔다.
법무법인 명재의 김성훈 변호사 역시 "의식적으로라도 표현을 중립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며 "민주주의 사회의 원리를 고려했을 때 그렇다"고 밝혔다.

"법원이 소송 사건에 대해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진 판결(判決). 여기에 어쩌다가 "내린다"는 동사가 함께 쓰이게 됐을까.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허인영 강사는 "'판결'이라는 표현이 처음 쓰이기 시작한 19세기 말에는 주로 '판결하다'가 쓰였다"며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판결을 내린다'는 표현이 등장한다"고 분석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 그대로 차용해온 표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며 "실제로 일본에 '判決を下す(판결을 내리다)'라는 똑같은 표현이 존재하며, 일본에서는 1900년대부터 나타난다"고 밝혔다.
최정규 변호사도 "당시 일본에서 사법제도를 참고하면서 함께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판결을 내린다" 외에 또다른 문제되는 표현은 없을까.
윤지영 변호사는 "같은 취지에서 '선처를 베푼다'는 표현도 일맥상통하다"고 했다. "형사사건에서 판사한테 '선처를 베풀어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역시 비슷한 문제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류인규 변호사는 "불필요하게 '명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석명준비명령, 보정명령 등이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무엇을 하게 한다'는 명령의 사전적 의미에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대신 '요구'라고 하는 게 적당할 것 같다"고 밝혔다.

편집자주
로톡뉴스는 "법원이 판결을 내리다"와 같은 표현이 법원이 국민 위에 있다는 인식을 강화한다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이에 앞으로 모든 기사에 "판결을 내리다"와 같은 표현은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