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게시판 욕설, '너인 줄 알면' 처벌된다…모욕죄의 딜레마
익명게시판 욕설, '너인 줄 알면' 처벌된다…모욕죄의 딜레마
전문가들 "피해자 특정성이 유무죄 가르는 핵심 열쇠"…증거 확보와 6개월 시효도 중요

회원제로 운영되는 익명게시판에서 자신을 향한 모욕적 글을 발견한 A씨. 그는 상대방을 고소할 수 있을까?/챗 지피티 생성 이미지
익명게시판 욕설, 제3자가 피해자를 알아볼 수 없다면 모욕죄 성립이 어렵다는 법률 전문가들의 분석이 나왔다.
“익명게시판에서 욕을 먹었는데, 고소할 수 있나요?”
한 온라인 커뮤니티 이용자의 질문이 익명성에 기댄 언어폭력의 책임을 어디까지 물을 수 있는지 묵직한 화두를 던졌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익명게시판에서 자신을 향한 모욕적 글을 발견한 A씨. 그는 가해자를 찾아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익명’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보이지 않는 상대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것은 정말 불가능할까.
"너인 줄 몰랐잖아"...모욕죄 발목 잡는 '특정성'의 벽
모욕죄(공연히 사람을 모욕하는 범죄)가 성립하려면 ①공연성 ②모욕적 표현 ③특정성, 세 가지 요건이 모두 충족돼야 한다. 익명게시판 사건의 가장 큰 걸림돌은 단연 ‘특정성’이다. 특정성이란 문제의 표현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피해자뿐 아니라, 글을 읽는 제3자도 명확히 알아차릴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다수의 법률 전문가들은 이 ‘특정성’의 문턱을 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법률사무소 정중동의 김상윤 변호사는 “운영자나 관리자가 회원의 신원을 알 수 있다 하더라도, 게시글을 읽는 일반 회원들이 특정된 사람을 알 수 없다면 특정성이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사이트 관리자만 아는 정보로는 법원이 요구하는 ‘제3자의 인식’ 기준을 통과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법무법인대한중앙의 조기현 변호사 역시 “일부 운영자가 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익명게시판일 경우 특정성이 인정되기 어렵다”며 비슷한 의견을 냈다.
익명의 가면 뚫는 '단서' 있다면...판은 뒤집힌다
그렇다고 모든 익명게시판의 욕설이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글의 내용이 익명이라는 가면을 뚫고 피해자의 얼굴을 가리킬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법무법인 JLP의 장동훈 변호사는 “글의 내용에 특정인을 지칭하는 맥락이 포함되어 있거나, 독자가 피해자가 누구인지 쉽게 유추할 수 있다면 특정성이 인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예를 들어 “OO 부서 김대리, 지난번 회식 때 진상이었어”처럼 신상 정보 일부가 언급되거나, 이전 글과의 연관성을 통해 주변인들이 피해자를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면 특정성이 인정될 수 있다. 대법원 역시 “표현의 내용을 주위 사정과 종합하여 볼 때 특정인을 지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경우”에는 모욕죄가 성립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
고소 결심했다면 '6개월 내 증거'부터 챙겨야
만약 특정성이 인정될 여지가 보인다면, 신속한 증거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모욕죄는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만 수사가 시작되는 ‘친고죄’이며, 범인을 알게 된 날로부터 6개월 안에 고소해야 하는 시효 제한도 있다.
김경태 법률사무소의 김경태 변호사는 “고소 시에는 해당 게시글 URL, 게시 일시, 내용 등을 캡처해 증거로 제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실명 회원가입 정보가 있다면, 수사기관의 압수수색 영장을 통해 IP주소와 가입정보를 확인할 수 있어 가해자 특정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가해자를 기술적으로 찾아내는 것 자체는 가능하단 뜻이다.
결국 익명게시판 욕설 사건은 ‘가해자 추적’은 가능하지만, ‘모욕죄 유죄’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법적 다툼을 결심하기 전, 내 사건이 ‘특정성’의 벽을 넘을 수 있는지 냉철하게 따져봐야 한다. 익명 뒤에 숨은 폭력의 책임을 묻는 길은 피해자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는 험난한 여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