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탄원서, 가해자가 본다?' 피해자의 끝나지 않은 공포
'내 탄원서, 가해자가 본다?' 피해자의 끝나지 않은 공포
피고인 방어권 vs 피해자 정보보호, 법원의 선택은?

범죄 피해자들은 재판 과정에서 엄벌탄원서 등 개인정보가 가해자에게 넘어갈까 불안해한다. / AI 생성 이미지
"제가 쓴 엄벌탄원서를 가해자가 전부 열람할 수 있나요?" 범죄 피해자들이 법정 밖에서 또 다른 불안에 떨고 있다. 가해자에게 자신의 개인정보와 고통의 기록이 고스란히 넘어갈 수 있다는 공포 때문이다.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이라는 법의 원칙과 2차 피해를 막아야 하는 피해자 보호의 가치가 충돌하는 현장, 그 아슬아슬한 균형의 실체를 파헤친다.
"내 개인정보, 가해자가 본다?"…피해자의 끝나지 않는 불안
범죄 피해자 A씨는 가해자의 재판을 앞두고 밤잠을 설친다. 가해자를 엄벌에 처해 달라는 마음으로 빼곡히 써 내려간 진술서와 탄원서가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A씨는 "진술서에 제 개인적인 이야기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가해자가 이걸 모두 본다면 보복의 빌미가 되지 않을까 두렵다"고 호소했다.
이는 A씨만의 고민이 아니다. 많은 피해자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정보가 피고인에게 어디까지 공개되는지 몰라 불안감을 느낀다.
법률 전문가들은 원칙적으로 피고인이 방어권 보장을 위해 관련 서류를 열람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형사소송법 제35조는 피고인과 변호인에게 소송 기록을 열람하고 복사할 권리를 부여한다.
법률사무소 조이의 윤관열 변호사는 "피고인(피의자 포함)은 방어권 보장을 위해 제출된 증거를 열람할 권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즉, 피해자가 제출한 엄벌탄원서와 진술서 역시 피고인이 열람 가능한 증거의 일부인 셈이다.
법원의 '가림막', 어디까지 보호해 주나
그렇다면 피해자의 정보는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일까? 다행히 법원은 '안전장치'를 두고 있다.
법률사무소 김경태의 김경태 변호사는 "피고인에게는 방어권 보장을 위해 재판 자료에 대한 열람권이 있으나, 동시에 피해자와 그 주변인의 보호도 중요하다"며 "법원은 이러한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처리한다"고 강조했다.
실무적으로 법원은 피고인에게 기록을 공개하기 전, 피해자의 민감한 개인정보를 가리는 '마스킹(masking)' 또는 '익명 처리' 절차를 거친다.
김 변호사는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주소 등 개인식별정보는 반드시 가려진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피해 경위나 진술 내용 자체는 공개될 수 있다.
윤관열 변호사는 "피해자 본인의 정보 외에 진술서나 탄원서의 내용이 가려지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민감한 정보가 포함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인 탄원서·녹음 파일도 '열람주의보'…대처법은?
피해자뿐 아니라 가족이나 지인이 제출한 엄벌탄원서도 원칙적으로 피고인이 열람할 수 있다. 주변인들의 개인정보 노출이 우려된다면, 피해자는 법원에 공식적으로 '소송기록 열람·등사 제한 신청서'를 제출할 수 있다.
윤관열 변호사는 "사전에 법원에 공식적으로 해당 문서 열람을 제한해 달라는 요청서를 제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피해 상황을 담은 녹음 파일의 경우, 피고인이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크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일반적으로 원본 파일이 아닌, 내용을 글로 옮긴 '녹취서' 형태로만 열람이 허용된다고 입을 모은다.
박성현 법률사무소 유(唯) 변호사는 "피해자가 녹음한 피해 상황은 원본 녹음 파일 복사는 불가능하고, 녹취서만 열람 가능하다"고 명확히 했다. 이는 피해자와 대화 상대방의 목소리 등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다.
대법원 사건의 '공론화', 제보 없이도 가능한 이유
한편, 피해자들은 자신의 사건이 원치 않게 언론에 공개될까 봐 걱정하기도 한다. 특히 대법원까지 가거나 사회적 이목을 끈 사건은 피해자의 제보가 없어도 기사화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대법원 판결문 등이 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에 공개되고, 법원을 출입하는 기자들이 이를 취재하기 때문이다.
윤관열 변호사는 "대법원까지 간 사건이나 재정 인용된 사건은 일반적으로 공개기록이 되며, 기자들이 이를 파악해 기사화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성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피해자의 신원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철저히 보호된다. 결국 재판 과정에서 2차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자신의 권리를 알고 적극적으로 법원에 보호 조치를 요청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