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고소 가능할까?" 1위로 꼽힌 직장 내 성범죄, 뒤늦은 신고도 처벌된다
"10년 만에 고소 가능할까?" 1위로 꼽힌 직장 내 성범죄, 뒤늦은 신고도 처벌된다
성폭력 피해자 10명 중 2명은 '직장 내 발생'
업무상 위력 탓에 길어지는 침묵
대법원 "수년 지난 지연 신고라도 진술 신빙성 훼손 안 돼"

피해 유형별·연령별 상담현황 /연합뉴스
가장 안전해야 할 일터가 범죄의 온상으로 변질되고 있다. 최근 발표된 2025년 성폭력 상담 통계에 따르면, 새롭게 접수된 성폭력 피해 사건 중 가해자가 '아는 사람'인 경우가 전체의 83.8%를 차지했다.
특히 이들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피해 유형은 다름 아닌 '직장 내 피해(19.8%)'였다. 친족이나 연인 등 친밀한 관계보다 직장에서 벌어지는 범죄가 더 잦았다는 의미다.
전체 피해자의 91.1%는 여성이었으며, 가해자의 85.7%는 남성으로 집계됐다. 범죄 유형별로는 강제추행(38.1%)과 강간(36.6%)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사건 발생 후 피해자가 입을 열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피해 발생 후 1년 이내에 신고한 비율이 42.1%로 가장 많았지만, '1년 이상 10년 미만'이 23.4%, 심지어 '10년 이상' 침묵했던 경우도 14.1%에 달했다. 절반에 가까운 피해자가 수년이 흐른 뒤에야 용기를 내어 세상에 피해 사실을 알린 것이다.

가장 믿었던 동료가 가해자로… 직장 내 계급이 만든 '업무상 위력'
왜 유독 직장 내 성범죄 피해자들은 오랜 시간 고통을 숨길 수밖에 없었을까. 이는 직장이라는 공간이 가진 특수한 상하관계와 '업무상 위력'이라는 법적 쟁점과 직결된다.
현행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0조 제1항은 직장 내 규정된 보호·감독 관계는 물론 실질적으로 고용관계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자가 위력을 이용해 추행한 경우 엄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법원이 바라보는 '위력'의 범위는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세력을 뜻한다. 즉 물리적인 폭행이나 협박이 없더라도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범죄가 성립된다. (수원지방법원 2016고단6177 판결)
실제 재판 과정에서도 직장 내 지위 차이는 매우 중요한 양형 요소로 작용한다.
법원은 하급자인 피해자가 범행을 당하고도 즉시 자리를 이탈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상하관계가 일정 부분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경험칙에 부합한다"고 명시하며, 가해자의 직장 내 지위를 강력한 처벌의 근거로 삼고 있다. (서울남부지방법원 2025고단1216 판결)
"이제 와서 신고한다고?"… 대법원, "지연 신고도 문제없다" 확고한 기준
가해자들이 흔히 방어 논리로 삼는 것이 바로 피해자의 '지연 신고'다. 사건이 발생한 지 수년이 지났거나 심지어 퇴사 후에 신고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들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깎아내리려 시도한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단호하다. 대법원은 "성폭력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구체적인 처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며 "통상적인 반응을 상정해 두고 이에 어긋난다는 이유만으로 진술의 합리성을 섣불리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명확히 판시했다. (대법원 2021도3451 판결)
하급심 법원 역시 직장 내 갑을관계나 상하관계로 인해 재직 중에는 차마 신고하지 못하다가 퇴사 후에야 고소에 이르게 된 피해자의 상황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사정으로 인정하고 있다. (인천지방법원 2018고정440 판결) 결국 오랜 시간 침묵했다는 사실 자체가 범죄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 확립된 법리다.
두려움에 숨지 마라… 피해자 곁에 마련된 빈틈없는 법률 지원 체계
직장 내 가해자의 보복이나 인사상 불이익이 두려워 직접 나설 수 없는 피해자들을 위해, 현재 법률은 강력하고 촘촘한 지원 체계를 마련해두고 있다.
피해자 본인이 직접 경찰서에 가기 어렵다면, 제3자를 통한 대리 신고나 성폭력피해상담소를 통한 고소장 작성 지원이 가능하다. 국가기관 등 공공단체 종사자는 직장 내 위력 추행 사실을 알게 된 즉시 수사기관에 신고할 법적 의무가 있으며, 이를 어길 시 과태료 처분을 받는다.
비용 문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형사절차 과정에서 검사가 직접 피해자를 위한 국선변호사를 선정해 주며, 이 변호사는 피해자를 대신해 소송행위를 포괄적으로 대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또한 성폭력피해자통합지원센터를 통해 의료, 상담, 수사, 법률 지원을 원스톱으로 무료 제공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법은 2차 피해를 엄격히 금지한다. 성폭력 발생 사실을 신고했다는 이유로 해고나 부당한 전보 등 일체의 불이익 조치를 취한 사업주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대법원은 이러한 불이익 조치가 "피해자에게 성희롱을 당한 것 이상의 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라고 지적하며 사업주의 무거운 책임을 묻고 있다.
수년이 흘렀어도 늦은 때는 없다. 범죄 사실이 사라지지 않듯, 법의 심판대 역시 가해자를 향해 열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