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교민 돕는 일인 줄 알았는데" 평범한 40대 가장, 보이스피싱 공범 됐다
"해외 교민 돕는 일인 줄 알았는데" 평범한 40대 가장, 보이스피싱 공범 됐다
"범죄인 줄 몰랐다" 주장 안 통해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등기우편인 줄 알고 문을 열자 경찰이 서 있었다. 해외 교포를 돕는 일이라 믿었던 아르바이트가 자신을 보이스피싱 조직의 공범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1년 전 한국에 돌아와 새 출발을 꿈꾸던 남성 A씨. 그의 삶은 구직 사이트에서 발견한 ‘누구나 쉽게 하는 일’이라는 문구 하나로 송두리째 무너졌다.
범죄의 '통신망'을 깔아줬다
텔레그램으로 연락한 업체 직원은 “해외 교민들이 저렴하게 한국 전화를 쓰도록 돕는 일”이라며 A씨를 안심시켰다. A씨가 할 일은 간단했다. 지시대로 인터넷 공유기와 여러 개의 유심을 사서 특정 장소에 설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A씨가 설치한 장비는 교민을 위한 통신 서비스가 아니었다. 해외에서 걸려온 보이스피싱 조직의 사기 전화를 ‘010’으로 시작하는 국내 번호로 바꿔주는 범죄의 심장부, ‘중계기’였다.
"정말 몰랐나" vs "모를 리 없었다"…미필적 고의라는 덫
A씨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자신은 단 한 번도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거나 돈을 요구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의 잣대는 냉정하다. 변호사들은 A씨의 행위가 전기통신사업법 위반과 사기방조 혐의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법무법인 베테랑의 김재헌 변호사는 “라우터와 유심을 다량으로 제공하는 행위는 범죄에 직접 사용될 통신수단을 제공한 것”이라며 “이는 범죄라는 연극의 주연 배우는 아니었지만, 배우들이 마음껏 연기할 수 있도록 ‘무대 장치’를 설치해준 핵심 스태프와 같아 공범으로 처벌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재판의 가장 큰 쟁점은 A씨가 자신의 행위가 범죄에 연루된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즉 ‘고의성’ 여부다. 여기서 등장하는 법률 용어가 바로 ‘미필적 고의’다. ‘미필적 고의’란, 범죄 발생을 적극적으로 원한 건 아니지만 그 위험성을 알면서도 행동했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다.
법무법인 공명의 김준성 변호사는 “대포폰 문제가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선불 유심을 타인에게 넘기는 행위만으로도 미필적 고의가 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고 경고했다.
실형이냐 집행유예냐, 인생의 갈림길
다행히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기다리는 A씨에게는 아직 기회가 남아있다. 실형을 피하고 집행유예 선처를 받기 위해서는 치밀한 법적 대응이 필수적이다.
변호사들은 A씨가 범죄임을 인지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입증할 구직 공고, 텔레그램 대화 내역 등을 모두 제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한 범죄로 얻은 수익이 전혀 없다는 사실,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절박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소명하는 것도 중요하다.
법률사무소 유의 박성현 변호사는 “초범이고 범죄에 소극적으로 가담했으며, 수사에 적극 협조하고 깊이 반성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집행유예나 벌금형의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