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세 때문에 한국 탈출한다? "가짜 뉴스 처벌 불가"…대한상의 논란에도 형사처벌 안 된다
상속세 때문에 한국 탈출한다? "가짜 뉴스 처벌 불가"…대한상의 논란에도 형사처벌 안 된다
2,400명 vs 139명
‘가짜뉴스’ 논란 휩싸인 대한상의에 정부 감사 착수

고개 숙이는 박일준 대한상의 부회장 /연합뉴스
대한상공회의소(이하 대한상의)가 배포한 보도자료 한 장이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고액 자산가들이 과도한 상속세 부담을 피해 해외로 도주하고 있다는 공포를 조장했으나, 정부 공식 통계와 비교 결과 무려 20배 가까운 차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엑소더스’ 괴담이 된 사설 업체의 보고서
사건의 발단은 지난 3일 대한상의가 발표한 ‘상속세수 전망 분석’ 자료였다. 해당 자료는 영국 이민 컨설팅사 ‘헨리앤파트너스’를 인용해 “2025년 한국을 떠난 백만장자가 2,400명으로 전년 대비 2배 급증했다”고 주장했다. 상의는 이 현상의 원인으로 ‘상속세 부담’을 정면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와 국세청의 확인 결과, 이는 명백한 허위로 밝혀졌다. 국세청 공식 통계에 따르면 연평균 고액 자산가 이민자는 139명에 불과했다. 상의가 인용한 수치와는 약 17~20배의 간극이 존재한다.
심지어 자료의 근거가 된 헨리앤파트너스는 전문 조사기관이 아닌 ‘영업 목적’의 사설 업체였으며, 원문 어디에도 이민의 원인이 상속세라는 내용은 없었다. 대한상의가 자신들의 정책 주장을 위해 데이터를 자의적으로 연결해 ‘아전인수’격 보도를 했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다.
정부 대응: “민주주의의 적” 대통령까지 가세한 강경론
정부의 반응은 이례적으로 강경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7일 SNS를 통해 “국민의 판단을 흐리려는 고의적 가짜뉴스는 민주주의의 적”이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 역시 9일 긴급현안점검회의에서 “신뢰할 수 없는 자료로 국민과 시장을 혼란에 빠뜨린 심각한 사안”이라며 대국민 사과와 함께 보도자료 작성 및 배포 전 과정에 대한 즉각 감사를 지시했다. 감사 결과에 따라 담당자에게는 엄중한 책임을 물을 방침이다.
‘가짜뉴스’는 분명한데, 왜 형사처벌은 어려울까?
허위 정보로 국가적 혼란을 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상의 측을 형사법으로 처벌하는 데에는 현행법상 뚜렷한 한계가 존재한다.
1. 명예훼손죄 적용의 한계 (형법 제307조 제2항 등)
명예훼손이 성립하려면 ‘특정인’의 사회적 가치를 저하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번 사안은 ‘고액 자산가’라는 불특정 집단의 통계를 다룬 것이므로 특정 개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보기 어렵다. (대법원 2008. 11. 27. 선고 2007도5312 판결)
2. 허위통신죄의 주관적 요건 (전기통신기본법 제47조 제2항)
타인에게 손해를 가하거나 이익을 얻을 ‘목적’이 입증되어야 한다. 정책 제언 과정에서의 통계 인용을 범죄적 고의로 연결하는 것은 법리적으로 매우 까다롭다. (의정부지방법원 2021. 5. 3. 선고 2020고정1570 판결)
3. 허위사실의 판단 기준
대법원은 내용 전체의 취지가 객관적 사실과 합치된다면 세부적인 수치 차이나 과장이 있더라도 허위사실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대법원 2011. 9. 2. 선고 2009다52649 판결) 사설 업체 통계를 ‘인용’했다는 형식을 취한 이상, 이를 곧바로 형사 처벌 대상인 ‘거짓’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행정적 문책과 자율규제가 현실적 해법
결국 이번 사태는 형사 처벌보다는 산업부의 직권 감사와 행정적 징계를 통해 마무리될 가능성이 크다. 대한상의는 정부 소관 법정단체로서 감독 대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언론중재법에 따른 정정보도 청구 등의 민사적 구제 수단이 더 실효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유럽의 경우 이미 가짜뉴스 대신 ‘허위정보’라는 개념을 도입해 공공의 해악을 끼칠 목적의 유포를 규제하고 있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의 ‘허위정보 규제법’ 논의가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