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유혹했다"던 그 남자... 스스로 건넨 '입막음 돈'이 발목 잡았다
"먼저 유혹했다"던 그 남자... 스스로 건넨 '입막음 돈'이 발목 잡았다
IQ 42 지인 성폭행하고 "몰랐다"
'입막음 돈'에 무너진 합의 주장의 결말

"장애인인 줄 몰랐다"던 가해자, 스스로 건넨 '입막음 돈'이 발목 잡아 징역 5년 선고.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지적장애인을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씨는 항소심 법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1심에서 혐의를 모두 인정했던 태도를 180도 바꾼 것이다. 그는 피해자의 지적 능력을 인지하지 못했으며, 강압 없는 합의된 관계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A씨의 항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정적인 단서는 다름 아닌 A씨가 피해자에게 건넨 '돈'이었다. 대전고등법원 제1형사부(2025노429)는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장애인준강간)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오래된 지인, IQ 42의 피해자, 그리고 건네진 돈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피고인 A씨와 피해자 B씨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다. 겉보기엔 평범한 지인 관계였지만, B씨는 사회적 연령이 낮은 지적장애인이었다. 사건 발생 후 실시된 심리평가 결과, B씨의 전체 지능지수(FSIQ)는 42로, 동일 연령 집단 100명 중 최하위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B씨는 불만족스러운 상황에 정당하게 항의하거나 위험한 관계를 중단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상태였다.
A씨는 이러한 B씨의 항거불능 또는 항거곤란 상태를 이용해 간음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문제의 성관계 직후 A씨는 B씨에게 돈을 건넸다. 그는 수사 과정에서 "성관계 사실이 소문날까 봐 돈을 주었다"고 진술했다. 이 행동은 훗날 법정에서 그의 '합의된 관계' 주장을 무너뜨리는 자충수가 되었다.
A씨는 1심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아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반성문까지 제출했다. 그 결과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량이 무겁다고 느낀 A씨는 항소심에 이르러 돌연 태도를 바꿨다. "1심 자백은 변호인이 시켜서 한 것일 뿐, 실제로는 피해자가 장애인임을 인지하지 못했고 피해자의 제안에 따라 성관계를 맺었다"며 무죄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소문날까 봐 돈 줬다"... 스스로 죗값 증명한 꼴
재판부는 A씨의 번복된 주장을 단호히 배척했다. 법적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A씨가 피해자의 장애 사실을 인지했는지, 그리고 성관계가 진정으로 합의에 의한 것이었는지 여부다.
첫째, 재판부는 A씨가 수사 초기 경찰 조사에서 했던 진술에 주목했다. A씨는 당시 "피해자가 장애인 등록이 된 사실은 몰랐지만, 일반인에 비해 판단력이 부족하고 지능이 떨어지는 것은 알고 있었다"고 명확히 진술했다. 법원은 피고인이 '등록 장애인'이라는 법적 지위만 몰랐을 뿐, 피해자의 지적 능력 결핍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둘째, A씨가 건넨 '돈'의 성격이 결정적이었다. A씨는 "처음 성관계를 했을 때 피해자가 돈을 요구하지 않았으나 소문이 날까 봐 돈을 주었다"고 진술했다. 재판부는 이 대목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만약 A씨가 피해자를 정상적인 판단 능력을 갖춘 성인으로 생각했고 서로 합의하에 관계를 맺었다면, 굳이 입막음 명목으로 돈을 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즉, 돈을 건넨 행위 자체가 자신의 행동이 떳떳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시인한 셈이 되었다.
또한 피해자 B씨의 진술 신빙성도 인정됐다. 진술 분석 전문가는 B씨가 피해 장소와 상황적 맥락을 일관되고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으며,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말하기 어려운 세부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신빙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피해자는 거부했지만... '공탁금'이 가른 형량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소심에서 형량은 1심의 징역 7년에서 5년으로 줄어들었다. A씨가 2심에 이르러 혐의를 부인하고 피해자 회유를 시도하는 등 죄질이 좋지 않았음에도 감형된 이유는 무엇일까.
'형사 공탁'이 변수였다. A씨는 1심에서 3,000만 원, 2심에서 2,000만 원 등 총 5,000만 원을 법원에 공탁했다. 피해자 측은 공탁금 수령 거부 의사를 밝혔고 A씨에 대한 엄벌을 탄원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피고인이 공탁물을 회수하지 않았으므로, 피해자가 추후에라도 이 돈을 수령해 피해를 일부 회복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의 장애를 알고도 이를 이용해 범행을 저질렀고, 범행 후 블랙박스 영상을 삭제하거나 거짓 진술을 하는 등 정황이 좋지 않다"고 질타했다. 그러나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한 점(공탁)과 동종 전과가 없는 점 등을 제한적으로 참작한다"며 감형 이유를 밝혔다.
결국 법원은 A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고,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와 아동·청소년 및 장애인 관련 기관에 10년간 취업제한을 명령했다. "몰랐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았지만, 거액의 공탁금이 실형의 무게를 일부 덜어준 셈이다.
[참고] 대전고등법원 2025노429 판결문 (2025. 9. 19 선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