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본 배달' 알바가 보이스피싱 공범으로…한 아버지의 비극
'번역본 배달' 알바가 보이스피싱 공범으로…한 아버지의 비극
통화녹취 다 있는데…기소유예와 실형, 법조계의 엇갈린 시선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번역본 서류 배달 일입니다.”
대형 구인 플랫폼을 통해 연락 온 출판사의 말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7일간의 평범했던 아르바이트는 아버지를 보이스피싱 조직의 현금 수거책으로 만들었고, 사건은 검찰로 넘어갔다.
아들은 모든 통화 녹취가 있다며 결백을 주장하지만, 법조계에서는 ‘고의성’ 입증을 두고 한 치의 양보 없는 공방을 예고하며 섣부른 낙관론을 경계하고 있다.
믿었던 출판사, 알고 보니 보이스피싱의 덫
평범한 구직자였던 아버지 A씨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악몽의 시작이었다. 자신을 ‘신 출판사’라고 밝힌 이는 대형 구인 플랫폼 이력서를 보고 연락했다며 “번역본(서류)을 배달해주는 일”을 제안했다. 실제 존재하는 회사 이름이었고, 첫날에는 이메일로 문서를 보내 직접 인쇄 후 배송하게 하는 등 치밀한 수법에 A씨는 완전히 속을 수밖에 없었다. 7일간 5건의 배달을 하며 건당 5만 원의 수고비를 받았다.
봉투는 늘 꼼꼼히 밀봉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번역 서류가 아닌, 범죄 피해자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보낸 현금이 들어있었다. 예정된 다른 회사로 출근하게 되어 일을 그만둔 뒤에야, A씨는 자신이 거대한 범죄의 톱니바퀴로 이용당했음을 깨달았다.
“몰랐다는 증거 충분” 기소유예 희망하는 가족
A씨의 사건은 현재 두 곳의 경찰서 조사를 거쳐 서울북부지검으로 송치됐다.
A씨의 가족은 “처음 그사람과 통화한 내역부터 일하는 7일의 통화녹취본을 다 가지고 있고 어플의 대화내용도 다 있습니다”라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법조계에서도 A씨의 고의성을 부정할 유리한 정황이 많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포 법률사무소의 김윤환 변호사는 “대형 구인 플랫폼을 통한 정상 채용 절차, 실존하는 출판사 명칭 사용, 초기 이메일을 통한 문서 전달, 밀봉된 봉투 상태, 통화·메신저 기록 전부 보존, 범행 구조에 대한 인식 부재 등은 모두 고의 부정에 유리한 사정입니다”라고 설명했다.
법무법인 유안의 조선규 변호사 역시 “판례는 ▲정상적인 구직 사이트를 통해 지원했는지, ▲업무 내용이 정상적인 것처럼 보였는지, ▲보수가 상식적인 수준이었는지, ▲수사기관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증거를 제출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고의 여부를 판단합니다”라며 유사 사건에서 무죄나 기소유예가 내려진 사례가 있음을 시사했다.
“기소유예 거의 불가능” 검사 출신 변호사의 냉엄한 경고
하지만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법원의 엄중한 처벌 기조에 비추어 볼 때 안심할 단계가 아니라는 경고가 잇따른다. 특히 검사 출신 변호사의 진단은 현실의 냉혹함을 보여준다.
솔루젠 법률사무소의 송승환 변호사는 경찰이 사건을 검찰에 송치한 것 자체가 ‘미필적 고의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라고 분석하며, “보이스피싱 사건의 경우 현금 전달액 전액 보상 및 합의 등의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기소유예가 나오는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라고 단언했다.
변호사 서아람 법률사무소의 서아람 변호사 또한 “수사 기관은 오히려 왜 서류 봉투의 무게나 촉감을 보고 현금임을 의심하지 않았는지 혹은 왜 번역본 배달 업무에 건당 오만 원이라는 고액의 수당을 지급하는지 등 이른바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의구심을 집요하게 파고들 것입니다”라며, 확보된 증거가 결백을 보장하는 절대적 무기는 아니라고 지적했다.
'피해자' 입증이 관건…“변호인 의견서 서둘러야”
결국 A씨의 운명은 검찰 단계에서 ‘범죄에 가담할 의사가 없었음’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증명하느냐에 달리게 됐다. 다수의 변호인들은 A씨가 범죄의 공범이 아닌, 조직에 기망당한 ‘피해자’라는 점을 법리적으로 주장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법무법인 대한중앙의 이동규 변호사는 “수거책 사건은 초동진술이 생명이라 이미 경찰조사를 마쳤다면, 이제는 “추가조사 대비”와 “검찰 단계 설득”이 핵심입니다”라고 강조했다.
JY법률사무소 이재용 변호사 역시 “다만 검찰은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건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므로, 단순히 억울함만 호소하기보다 확보된 증거를 법리적으로 분석하여 범죄임을 인지할 수 없었던 객관적 사정을 담은 변호인 의견서를 신속히 제출해야 기소유예나 무혐의 처분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라고 조언했다.
재판으로 넘어가기 전, 검찰을 설득할 마지막 기회인 지금이 바로 전문적인 법률 대응이 가장 절실한 골든타임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