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속옷에서 범인 DNA 나왔지만…27년째 계속되는 아버지의 싸움
딸 속옷에서 범인 DNA 나왔지만…27년째 계속되는 아버지의 싸움
'정은희 양 사건'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

법원에 들어가는 정현조 씨 모습. /연합뉴스
1998년 그날 이후, 채소 장수 정현조 씨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딸의 죽음이 '단순 교통사고'라는 경찰 발표를 믿을 수 없었던 아버지는, 15년간의 외로운 추적 끝에 범인의 DNA를 찾아냈지만 결국 그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지 못했다.
"고속도로에 버려진 팬티 많다" 경찰의 황당한 답변
1998년 10월 17일 새벽, 정현조 씨는 계명대 간호학과 1학년이던 딸 정은희 양이 병원에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학교 축제에 갔던 딸은 구마고속도로에서 23톤 덤프트럭에 치여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뒤였다. 경찰은 운전기사의 "갑자기 뛰어들었다"는 진술을 토대로 단순 교통사고로 사건을 종결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사고 현장에는 급정거 시 생기는 스키드마크가 없었고, 23톤 트럭에 치인 시신이라기엔 내부 장기 파열도 없었다. 무엇보다 딸의 속옷이 벗겨진 채 시신에서 30m 떨어진 풀밭에서 발견된 점은 명백한 범죄 흔적이었다.
정 씨는 딸이 성폭행당한 뒤 살해됐고, 범인이 이를 교통사고로 위장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경찰의 대응은 황당했다. 딸의 속옷이 맞다고 주장하는 아버지에게 "고속도로에 가면 버려진 팬티가 많다", "아줌마 팬티 같다"며 감정 의뢰를 미뤘다. 사건 발생 5개월 뒤에야 국과수에 넘어간 속옷에서는 정액 양성 반응이 나왔다.
컴퓨터 배우고 법 공부하며…아버지의 15년 추적
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아버지는 모든 것을 걸었다. 당시만 해도 낯설었던 컴퓨터를 독학해 인터넷에 딸의 사연을 올렸고, 어려운 법률 용어와 씨름하며 직접 쓴 진정서와 탄원서를 60여 차례나 청와대 등 정부 기관에 제출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혐의 없음', '공람 종결'이라는 절망적인 답변뿐이었다.
포기하지 않은 아버지의 집념은 사건 발생 15년 만인 2013년, 기적 같은 전환점을 맞았다. 검찰이 다른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로 입건된 스리랑카인 A씨의 DNA가 은희 양의 속옷에서 나온 정액 DNA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12일 YTN 라디오 '이원화 변호사의 사건X파일'에 출연한 김동현 변호사(로엘 법무법인)는 "당시 검찰은 A씨 등 3명이 은희 양을 집단 성폭행했고, 도망치던 은희 양이 고속도로에서 사고를 당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범인은 찾았지만, 처벌은 불가능했다
범인의 윤곽이 드러났지만, 또 다른 벽이 가로막았다. 바로 '공소시효'였다. 특수강간의 공소시효 10년이 이미 지나버린 것이다.
검찰은 공소시효가 15년으로 더 긴 '특수강도강간' 혐의를 적용해 A씨를 기소했다. 범인들이 은희 양의 현금과 학생증을 빼앗았다는 진술을 근거로 삼았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1, 2심에 이어 2017년 대법원까지 "15년 전의 일이라 강도 혐의를 입증할 증거와 진술의 신빙성이 부족하다"며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결국 A씨는 스리랑카로 추방됐고, 현지 법정에서도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범인의 DNA는 찾았지만, 초동 수사 실패와 시간의 벽에 막혀 법적 처벌은 불가능해진 것이다.
정현조 씨는 지금도 A씨가 아닌 진범이 따로 있다고 믿으며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27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용의자를 찾더라도 처벌은 쉽지 않다. 하지만 딸의 마지막을 밝히려는 아버지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