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혈압 숨기고 가입했는데... 법원 "보험금 4,500만 원 지급하라" 반전 판결의 이유
고혈압 숨기고 가입했는데... 법원 "보험금 4,500만 원 지급하라" 반전 판결의 이유
"병력 숨기면 계약 해지" 설명 안 했다면 고지의무 위반해도 보험사 책임
보험설계사가 '아니오' 일괄 체크
중요 사항 설명 의무 위반이 더 커

보험 가입 시 병력을 숨겼더라도 설계사가 '고지의무 위반 시 계약이 해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다면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과거 병력을 숨기고 보험에 가입했다면, 추후 발병 시 보험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계약이 해지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최근 법원은 정반대의 판결을 내렸다. 가입자가 고혈압과 협심증 치료 사실을 알리지 않은 명백한 '거짓 고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험사는 약 4,500만 원의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핵심은 보험사가 가입자에게 져야 할 '설명 의무'였다. 가입자가 병력을 알리지 않은 잘못보다, 보험설계사가 "병력을 제대로 알리지 않으면 계약이 해지될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은 과실이 더 크다고 본 셈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2023가단5491960)이 내린 이번 판결은 보험 계약 과정에서 설계사의 설명 책임이 어디까지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설계사가 대신 체크한 '아니오'... 고혈압 병력 묻힌 채 체결된 계약
사건은 2020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고의 남편인 망인 E씨는 보험설계사 C씨를 통해 피고 보험사(B 주식회사)의 보험에 가입했다. 계약 체결 당시 작성해야 하는 '계약 전 알릴 의무 사항(고지의무)' 질문지에는 최근 5년 이내의 입원, 수술, 7일 이상 치료 여부 등을 묻는 항목이 있었다.
사실 E씨는 보험 가입 전인 2018년부터 2020년 사이 협심증과 고혈압으로 수차례 통원 치료와 약물 처방을 받은 전력이 있었다. 당연히 질문지의 해당 항목에 이를 기재하고 알려야 했다. 그러나 청약서에는 2019년 상해로 인한 입원 이력 하나만 기재되었을 뿐, 고혈압과 협심증 관련 질문에는 모두 '아니오'라고 표기되었다.
문제는 이 답변을 기재한 주체였다. 당시 설계사 C씨는 E씨가 가입한 다른 실손보험의 청구 내역을 조회해 상해 사고 하나만 확인한 뒤, E씨에게 "이것 외에 다른 치료 이력은 없느냐"고 묻고는 직접 질문지 항목에 '아니오'를 체크했다. E씨는 설계사가 작성한 서류 하단에 서명만 했다. 이후 2022년 9월, E씨는 허혈성 심장질환에 의한 급성 심장사로 추정되는 사인으로 사망했고, 유족인 원고는 보험금을 청구했다.
"거짓 고지로 계약 해지" vs "해지된다는 설명 못 들었다"
보험사 측은 즉각 반발했다. E씨가 협심증과 고혈압이라는 중요한 병력을 숨기고 가입했으므로 약관에 따라 계약을 해지하고 보험금을 줄 수 없다고 통보했다. 실제로 해당 보험 약관에는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중요한 사항을 사실과 다르게 알린 경우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었다. 보험사는 이를 근거로 이미 납입한 보험료 일부만 돌려주고 계약을 종료시켰다.
그러나 유족 측은 맞섰다. 보험설계사가 계약 당시 "고지의무를 위반하면 계약이 해지될 수 있다"는 약관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설계사가 묻는 대로 대답하고 서명했을 뿐, 병력을 알리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불이익에 대해 듣지 못했으므로 보험사가 이를 근거로 계약을 해지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결국 쟁점은 두 가지로 좁혀졌다. 가입자의 '고지의무 위반'과 보험사의 '약관 설명 의무 위반' 중 무엇이 우선하느냐는 것이다.
법원 "깨알 같은 약관 문구만으론 부족... 구체적으로 설명했어야"
재판부는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설령 망인 E씨가 병력을 알리지 않은 잘못(고지의무 위반)이 있더라도, 보험사가 그에 앞서 '설명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약 해지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보험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 입장에서 질문지에 나열된 수많은 질병 중 어떤 것을 알리지 않았을 때 계약이 해지되는 '중요한 사항'인지 알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질문지 상단에 부동문자로 '사실과 다르게 알리면 해지될 수 있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재판부는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봤다. 설계사가 개별 질문 항목을 짚어가며 "이 내용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나중에 보험금이 지급되지 않거나 계약이 해지된다"는 점을 명확히 고지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설계사 C씨의 행동이 결정적이었다. C씨는 전산 조회로 확인된 상해 이력 외에 다른 병력이 없는지만을 형식적으로 물어보고 직접 '아니오'를 체크했다. 법원은 이를 두고 "설계사가 망인에게 고지의무 위반 시 효과에 대해 설명할 기회를 스스로 놓쳤거나,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보험사가 설명 의무를 위반한 이상, 가입자의 고지의무 위반을 탓하며 계약을 깰 수는 없다는 법리가 적용됐다.
가입자 실수 있어도 보험사 책임 묻는다... 약 4,600만 원 지급 판결
결국 서울중앙지방법원은 피고 보험사가 원고에게 약 4,594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당초 청구된 사망보험금 5,000만 원에서, 보험사가 계약 해지를 주장하며 유족에게 이미 반환했던 보험료(부당이득) 약 434만 원을 상계한 금액이다.
이번 판결은 보험 계약 과정에서 '깨알 약관'에 의존하는 보험사의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단순히 서류에 서명을 받았다고 해서 설명 의무를 다한 것이 아니며, 가입자가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핵심 내용은 설계사가 '구두로', '상세하게' 설명해야 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다.
법원은 "보험사가 약관의 명시·설명 의무를 위반하여 계약을 체결한 때에는 그 약관 내용을 계약의 내용으로 주장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를 인용하며, 보험금 지급의 정당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