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은 '재판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고지받을 권리가 있다
피고인은 '재판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고지받을 권리가 있다
"집주소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시종일관 공시송달로 진행된 사건
대법원 "피고인은 다시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 결정

자신의 재판 사실을 몰랐던 피고인 A씨. 법원이 '공시송달'을 했지만 A씨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법원은 피고인에 대한 공시송달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재심 판결을 내렸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하루 벌어 하루를 살던 일용노동자인 A씨. 얼마 전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러 차례 진행된 재판은 벌써 2심까지 마무리된 상태였다.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이었다.
그동안 소송과 관련된 서류를 하나도 받아본 적이 없던 A씨는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 지난 2016년에 폭행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은 적이 있지만, 그 이후에 재판이 열린 것은 전혀 몰랐다.
법원에 알아보니 공시송달(公示送達)이란 제도를 통해 재판이 열렸다고 했다. 이 제도를 활용하면 A씨에게 직접 서류를 전달하지 않아도 '전달된 것'과 똑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했다.
하지만 전국의 공사 현장을 떠돌며 일하는 A씨는 서류도 직접 보내지 않고 인터넷 홈페이지 어딘가에 올린 게시글 하나로 '본인에게 통보가 완료됐다'고 간주하는 이 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억울한 A씨는 대법원에 탄원했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대법원에 올라가는 사건 대부분은 제대로 된 심리도 한 번 거치지 않은 채 기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의외의 결정을 내놨다. 대법원 형사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14일 "A씨는 다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선고했다고 밝혔다.
대법원이 앞선 1⋅2심 재판에서 가장 큰 문제였다고 본 것은 '공소장 전달 과정'이었다. 공소장이란 어떤 혐의로 누군가를 재판에 넘기겠다는 내용을 공식적으로 정리한 문서다. 검찰이 이 서류를 법원에 전달하고, 법원이 이 서류가 접수됐다고 당사자(피고인)에게 알리면서 재판이 시작된다.
그런데 A씨는 이 공소장 자체를 받아보지 못했다. 그가 자신에 대한 소송이 시작되는지 몰랐던 이유다. 재판이 시작되는지 몰랐으니,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당연히 패소했다. 대법원은 이 점에서 "A씨가 다시 재판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법원이나 검찰이 일부러 A씨에게 재판 진행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전국을 돌며 생활하는 A씨의 주소가 명확하지 않아서 전달하지 못했을 뿐이다. 주소를 모르니 어쩔 수 없이 '공시송달' 방법으로 재판 진행 사실을 공고한 것이다.
공시송달은 재판 당사자의 소재를 알 수 없는 경우 '송달할 서류를 법원이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법원 게시판 등을 통해 알리는 제도다. 게시 후 2주가 지나면, 피고인 없이 판결을 선고할 수 있다.
대법원은 이런 점을 고려해, A씨 재판이 ①처음부터 이런 공시송달 방법으로 진행됐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②재판에 나오지 않은 A씨에게 그 책임을 돌릴 수 없다고 보았다. '재판이 시작되는지도 몰랐던 A씨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취지였다
재판 결과 A씨는 상소를 할 수 있는 상소권이 다시 생겼으며(상소권 회복), 다시 재판(재심)도 받을 수 있게 됐다.
법무법인 이평의 박세훈 변호사는 "공시송달로 진행된 궐석 재판으로 판결이 확정된 경우, 상소권 회복을 폭넓게 인정해주는 경향을 보인다"고 평가했다.
이신광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국가 형벌권 행사의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며,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측면에서도 타당하다"고 했다.
법률자문

대법원은 그렇다고 해서 공시송달 자체를 문제 삼는 건 아니다. 여전히 공시송달은 유효하다. 재판정에 불출석하는 사람들이 A씨와 같은 판결이 나오길 기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번 대법원 판결을 봐도 그렇다. 대법원은 공시송달을 통해 공소장을 받지 못한 A씨에게 고의가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폈다. 그러면서 "A씨는 '(본인이) 책임을 질 수 없는 사유'로 재판에 나오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박세훈 변호사는 "'책임질 수 없는 사유'란 상소를 제기할 수 있는 기간에 상소하지 않은 것에 대해 피고인의 고의 또는 과실이 없는 경우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지난 2017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업무방해 혐의로 재판이 열렸지만, 이 사건 피고인은 기소 사실을 전달받지 못했다. 당시에도 대법원은 해당 피고인에게 재판에 나오지 않은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인정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걸까. 변호사들은 '공시송달'이 가진 내재적 문제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공시송달은 재판이 지연되지 않도록 하는 긍정적 기능이 있지만, 동시에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하는 부정적 특성도 갖고 있다.
이신광 변호사는 "피고인의 주거지가 일정하지 않거나, 그 밖의 이유로 피고인이 법원에서 송달된 서류를 수령할 수 없는 경우 공시송달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며 "소송의 원활한 진행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통신사에 대한 영장, 사실조회를 통해 피고인의 휴대전화 번호를 확보한 후 통화, 문자메시지로 공소장을 송달하는 등 제도적 장치가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박세훈 변호사는 "신속한 재판과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을 균형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공시송달의 요건과 구체적인 절차를 명문으로 규정하고, 궐석 재판(불출석 재판)의 허용 범위를 합리적 범위 내로 축소하는 등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