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 신고 1만 6000건 시대…사장이 괴롭혔는데 사장에게 "조사해라"
직장 내 괴롭힘 신고 1만 6000건 시대…사장이 괴롭혔는데 사장에게 "조사해라"
1만 6000건 신고에 기소 101건
숫자가 감춘 것은

지난해 직장 내 괴롭힘 신고가 1만 6300건에 달했지만 기소는 101건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회사 자체 조사에 의존하는 제도 구조가 한계라고 지적했다. /셔터스톡
하루 평균 45건, 1년에 1만 6000건 넘게 쏟아지는 직장 내 괴롭힘 신고. 하지만 실제 유의미한 처벌로 이어지는 비율은 단 2%대에 불과하다.
지난해 고용노동부에 접수된 직장 내 괴롭힘 신고는 1만 6300여 건으로, 제도가 시행된 2019년 이후 5년 사이에 181%가 증가하며 매년 역대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반면 지난해 처리가 완료된 1만 5655건 중 기소는 101건, 과태료 부과는 231건에 그쳤다.
이러한 통계를 두고 일각에서는 일단 신고부터 하고 보는 '묻지마 진정'이나 제도를 악용하는 이른바 '을질'이 늘어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그 근거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숫자가 바로 '법 위반 없음'으로 종결된 사건(지난해 5177건)이다.
그렇다면 절반 가까운 사건이 혐의가 없다고 결론 난 이 통계는, 정말 무고한 신고가 폭증했다는 증거일까.
법 위반 없음 = 괴롭힘 없음?…숨겨진 함정
'법 위반 없음'이 곧 괴롭힘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10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한 유승민 작가는 현행 제도의 구조적 한계를 꼬집었다. 유 작가는 "괴롭힘이 인정되더라도 적절한 조치를 했다고 판단되면 그것도 법 위반 없음으로 종결된다"고 설명했다.
더 큰 문제는 조사 주체다. 직장 내 괴롭힘은 조직 내부 갈등으로 간주하여, 일차적으로 해당 사업장이 자율적인 조사를 하도록 정해져 있다.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괴롭힘이 인정되지 않거나, 회사가 가해자에게 최소한의 징계(공간 분리, 경고 등)만 내리고 사건을 덮어버려도 고용노동부 단계에서는 '법 위반 없음'으로 처리될 수 있다는 뜻이다. 판단 근거 자체가 회사가 올린 자체 조사 보고서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가해자인 사장에게 "셀프 조사해라"
제도의 허점은 가해자가 '사용자(사장)'이거나 '사용자의 친인척'일 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원칙적으로 이 경우에는 피해자가 회사 내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노동청에 진정을 넣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시민단체 '직장갑질 119'의 윤지영 변호사는 방송 인터뷰를 통해 황당한 실태를 고발했다.
윤 변호사는 "노동청에서 사용자가 괴롭혔는지를 판단해서 과태료를 부과해야 하는데, 노동청에서 진정을 하면 돌려보낸다"며 "다시 사건을 사용자한테 셀프 조사를 하라고 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윤 변호사는 "어떤 결과가 나오겠느냐. 그냥 '나는 괴롭힌 적 없다'라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며 "그걸 노동청에 제출하면 노동청은 그 자료를 보고 '사용자가 괴롭힌 적 없네'라고 해서 종결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고 덧붙였다.
신고 증가는 오남용 탓? "낙인찍힐 각오로 내는 용기"
결국 '법 위반 없음'이라는 숫자 뒤에는 억울하게 사건을 덮어야 했던 피해자들의 눈물이 섞여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신고 건수의 급증을 단순한 제도 오남용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윤지영 변호사는 "신고자들이 신고까지 할 때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며 "우리 사회 특성상 신고한 사람만 오히려 낙인찍히고 더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않고 보통은 그냥 참는다"고 현장 목소리를 전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핵심은 사내 자정 작용과 재발 방지다. 신고가 늘어나는 현상을 두고 '법 만능주의'나 '묻지마 진정'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반대로 보면 국가 기관에 도움을 요청하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노동자들의 믿음이 그만큼 커졌다는 신호로도 해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