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 박스 줍다 ‘절도범’ 전락… 법원 “3분간 서성인 게 결정적 증거”
길가 박스 줍다 ‘절도범’ 전락… 법원 “3분간 서성인 게 결정적 증거”
건물 안쪽이면 ‘유죄’, 개방된 도로면 ‘무죄’
점유 판단의 법적 경계선

건물 안쪽 여부와 내용물을 확인하며 서성인 행동이 길거리 물건 습득 사건에서 절도 고의를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길거리나 건물 주변에 놓인 물건을 무심코 가져갔다가 절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겉보기에 버려진 물건처럼 보여도, 놓인 위치와 가져갈 당시의 행동에 따라 법원의 판단은 ‘무죄’와 ‘유죄’로 극명하게 갈린다.
핵심 쟁점은 해당 물건이 소유자가 소유권을 포기한 ‘무주물’인지, 아니면 잠시 놓아둔 ‘점유물’인지에 대한 판단이다. 법원은 물건이 놓인 장소의 특성, 물건의 상태, 그리고 피고인의 구체적인 행동 패턴을 종합해 절도의 고의성을 판단하고 있다.
건물 안쪽과 바깥쪽, ‘한 뼘’ 차이가 가른 유무죄
물건이 놓인 장소가 일반인의 출입이 자유로운 곳인지, 아니면 특정인의 관리 영역 내인지가 첫 번째 판단 기준이다.
대구지방법원은 길거리가 아닌 건물 출입문 계단 입구 안쪽에 놓인 상자를 가져간 A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2022노4095). 재판부는 해당 장소가 길거리와 접한 외벽이 아니라 건물 내부로 볼 수 있는 안쪽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소유자가 물건을 버린 것이 아니라 배송이나 이동 과정에서 잠시 놓아둔 것으로 볼 여지가 크다는 판단이다.
반면,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은 고가도로 아래 인도와 철조망 사이에 놓인 종이박스를 가져간 B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2021고단2180). 법원은 “누구나 지나갈 수 있는 개방된 장소였고, 소유자가 있다는 표식이나 가져가지 말라는 경고가 없었다”며 피고인이 버려진 물건으로 오인할 만한 정당한 사유가 있었다고 봤다. 즉, 통제되지 않는 공개된 장소에 놓인 물건은 소유권 포기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3분 20초간 내용물 확인… “단순 수거 아닌 물색 행위”
가져가는 사람의 행동 또한 절도 고의를 판단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앞서 유죄 판결을 받은 A씨의 경우, 폐쇄회로(CC)TV에 포착된 행동이 발목을 잡았다.
A씨는 상자를 발견한 즉시 가져가지 않고 약 3분 20초 동안 상자 앞에 머물렀다. 그는 상자 안을 들여다보거나 만져보는 등 내용물을 확인한 뒤 물건을 가져갔다. 법원은 이러한 행동을 단순한 폐지 수거가 아닌, 경제적 가치가 있는 물건을 찾는 ‘물색 행위’로 판단했다. 내용물을 확인하고 가져갔다는 것은 타인의 소유물일 가능성을 인식했을 수 있다는 취지다.
이와 대조적으로 수원지방법원은 대낮에 분리수거함 옆에 놓인 에어청소기를 가져간 C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2022고정192). 재판부는 “피고인이 대낮에 물건을 감추거나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들고 이동했다”는 점을 근거로 삼았다. 은밀하게 행동하지 않고 당당하게 가져간 태도가 오히려 절도의 고의가 없었음을 입증하는 정황으로 참작된 것이다.
정리된 상태인가, 쓰레기장인가… 물건의 외관이 말하는 것
물건이 놓인 상태와 주변 환경도 법적 판단의 근거가 된다. 제주지방법원은 평소 피해자가 고물을 수집해 쌓아두던 장소에서 폐지를 가져간 D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2021노752). 해당 장소가 피해자의 고물 보관 장소임을 알 수 있었고, 물건이 흐트러지지 않고 정리되어 있었다는 점이 유죄의 근거가 됐다.
반면 서울동부지방법원은 주차장 쓰레기 집하장에 놓인 헌 옷과 캔 등을 가져간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2021노1029). 재판부는 해당 물건들이 재산적 가치가 미미하고, 평소 재활용 쓰레기가 배출되는 장소에 놓여 있었다는 점을 들어 소유권이 포기된 것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판시했다.
“가져가도 되나요?” 질문 한 번이 운명 바꿔
소유권 포기 여부가 불분명할 때, 관리자에게 확인을 거치는 절차는 법적 책임을 면하는 결정적 요소가 된다.
호텔 복도에 이틀간 방치된 탁자를 가져갔다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던 E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헌법재판소는 E씨가 관리사무소 직원에게 “버려진 탁자를 가져가도 되는지” 물어본 뒤 가져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기소유예 처분을 취소했다(2023헌마93).
방치된 기간이 길었고 관리자에게 확인까지 거쳤다면, 타인의 물건을 훔치려는 고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법리의 핵심이다. 결국 길거리 습득물이 절도죄가 되지 않으려면 장소의 개방성, 물건의 방치 상태, 그리고 습득자의 확인 노력이 입증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