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전 방송국 PD의 몰락, "보이스 피싱 업무인 줄 몰랐다"는 변명 안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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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전 방송국 PD의 몰락, "보이스 피싱 업무인 줄 몰랐다"는 변명 안통했다

2025. 08. 15 23:57 작성
김혜지 기자의 썸네일 이미지
hj.kim@lawt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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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범죄 가능성 알면서도 용인” 미필적 고의 인정

평범한 구직 활동이 5억 원대 금융사기 공범으로 가는 지름길로

고작 163만원 때문에 2년 6개월의 실형

기사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 이미지.

검사를 사칭한 보이스피싱 조직의 지시를 받고 피해자들로부터 4억 9천만 원을 받아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전직 방송국 PD가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이력서 한 통이 쏘아 올린 비극…'부동산 회수'라던 수상한 알바

한때 방송국 PD로 일했던 A씨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린 건 구직 사이트에 올린 이력서 한 통에서 시작됐다. 자신을 'G 팀장’이라 소개한 인물은 A씨에게 부동산 조사 회사 업무를 제안했다. 처음엔 아파트 사진을 찍고 상권을 분석하는 평범한 일이었다. 하지만 며칠 뒤, G 팀장은 “부동산 계약이 틀어져 분쟁 소지가 있는 돈을 받아오는 일”이라며 ‘회수건’이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다.


면접도, 근로계약서 작성도 없었다. 모든 지시는 카카오톡으로만 이뤄졌다.


G 팀장 등 보이스피싱 조직이 검사나 금융감독원 직원을 사칭해 피해자를 속이면, A씨는 이들로부터 거액의 현금(수표)을 건네받는 ‘현금 수거책’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검사 사칭에 4.9억 '꿀꺽'…“간첩 접선 같았다”

“당신 명의 카드가 범죄에 연루됐다. 자산을 보호해주겠다.”


보이스피싱 조직의 레퍼토리는 치밀했다. 검사와 수사관을 번갈아 사칭하며 피해자들을 공포에 몰아넣었고, 겁에 질린 피해자들은 전 재산을 수표로 찾아 A씨에게 건넸다. A씨는 2023년 10월 말부터 약 한 달간 호텔 앞, 지하철역 출구 등에서 8명의 피해자로부터 총 4억 9,560만 원을 수거했다.


영수증 한 장 없이 돈을 받아 곧바로 다른 조직원에게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A씨 스스로도 경찰 조사에서 “무슨 간첩 접선하는 것도 아니고”라고 혀를 내둘렀을 만큼 모든 과정은 비정상적이고 은밀했다.


“몰랐다”는 항변, 법원은 왜 외면했나…'미필적 고의'의 덫

법정에 선 A씨는 “사기 범죄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정상적인 회사 업무로 굳게 믿었다는 항변이었다. 하지만 서울남부지법 형사11부(재판장 장찬 부장판사)는 A씨의 주장을 일축했다. 범죄 발생 가능성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이를 용인했다면 죄가 성립한다는 ‘미필적 고의(未必的 故意)’가 명백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정식 채용 절차나 신원 보증도 없이 거액의 현금을 다루게 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업무를 지시한 점 등을 종합하면 정상적인 업무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방송국 PD 등 수년간 사회경험이 있는 피고인이 자신의 행위가 보이스피싱 범죄일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했을 것”이라며 건당 8만 원이라는 이례적으로 높은 수수료 역시 의심을 뒷받침하는 정황이라고 봤다.


징역 2년 6개월 실형…'무지'는 더 이상 면죄부 아니다

재판부는 “보이스피싱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막대한 재산적·정신적 피해를 주는 중대 범죄”라며 “피고인이 담당한 현금 수거 역할은 범죄 수익을 실현하는 데 필수적이라 그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꾸짖었다.


다만 A씨가 초범이고 범행으로 직접 챙긴 이익이 163만 원으로 비교적 적은 점 등을 감안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이번 판결은 ‘나는 몰랐다’는 변명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법부의 서늘한 경고다. 고액 알바라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 비정상적인 업무에 발을 들인다면, 범죄의 전모를 몰랐다 해도 공범이라는 무거운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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