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롭힘·산재 다 인정됐는데, 수사는 왜 제자리걸음일까?
괴롭힘·산재 다 인정됐는데, 수사는 왜 제자리걸음일까?
차 가해와 불이익 조치까지…가해자와 회사에 함께 책임을 묻는 법

직장 내 괴롭힘으로 산재 승인을 받았음에도 가해자 처벌은 지지부진한 것은, 산재와 별개로 형사상 상해죄의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 AI 생성 이미지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통받던 A씨는 녹취와 메모 등 증거를 모아 노동부에 신고했고, 마침내 '직장 내 괴롭힘' 인정을 받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A씨는 괴롭힘으로 얻은 불안장애에 대해 산업재해(산재)까지 승인받았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사과 없이 SNS 프로필 사진으로 조롱하는 등 2차 가해를 이어갔고, 회사는 A씨를 복귀시키기는커녕 집단 따돌림을 방치했다.
결국 A씨는 형사 고소에 나섰지만, 수사관은 산재와 상해의 인과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수사는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모든 증거를 갖추고도 실질적인 처벌과 배상이 이뤄지지 않는 답답한 상황,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산재 인정이 '상해죄' 자동 입증은 아냐…'인과관계' 별도 증명해야
A씨의 가장 큰 답답함은 '불안장애' 산재 승인이라는 강력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형사 수사가 맴도는 점이다. 변호사들은 산재 인정과 형사상 상해죄 인정은 별개의 절차이며, 입증의 수준도 다르다고 지적한다.
법무법인 도모 고준용 변호사는 "산재 승인과 괴롭힘 인정은 형사 및 민사 절차에서 강력한 무기이나, 이것만으로 상해죄의 인과관계가 자동 성립되지는 않는다"며 "수사기관은 질문자님의 불안장애가 특정 가해 행위와 어떻게 직접적으로 연결되는지를 입증하라고 요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가해자의 특정 행위가 불안장애를 유발하거나 악화시켰다는 점을 형사 재판의 엄격한 증명 기준으로 다시 입증해야 한다는 의미다.
법률사무소 태희 민경남 변호사 역시 "정신과적 질환이 괴롭힘으로 발병하였다는 점을 산재 기록으로 입증한다면, 형사 처벌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수사기관이 괴롭힘 인정 사실에만 매몰되어 상해와의 인과관계를 깊이 확인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범죄 요건에 맞춘 체계적인 법리 주장을 통해 올바른 수사 방향을 설정하는 과정이 요구된다"고 조언했다.
이를 위해 변호사들은 노동부 결정서, 산재 승인 자료 외에 담당 의사로부터 '괴롭힘과 정신질환 사이의 인과관계'를 명시한 진단서나 소견서를 추가로 받아 수사기관에 제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신고 후 보복성 조치…'회사'와 '대표'도 형사 처벌 대상
가해자 개인의 처벌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회사의 책임이다. 특히 A씨처럼 괴롭힘 신고 이후 가해자 분리 조치 없이 오히려 집단 따돌림 같은 불이익을 당했다면, 이는 회사와 대표이사를 상대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핵심 근거가 된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사용자는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이유로 피해 근로자에게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처우를 할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디센트 법률사무소 임호균 변호사는 "사용자는 신고자와 피해근로자에게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처우를 할 수 없고, 이를 위반하면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며 "다만 집단 따돌림이 있었다는 사정만으로 대표와 관리자 모두가 처벌되는 것은 아니며, 인사상 불이익의 내용과 각자의 지시·가담 여부를 구체적으로 입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법무법인(유한) 엘케이비평산 정진열 변호사는 "'분리 조치 없이 사과문 서명을 강요한 점', '복귀 후 집단 따돌림을 방치한 점'을 묶어 대표이사를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고소하라"고 조언했다. 회사가 괴롭힘 사실을 알고도 피해자 보호 의무를 다하지 않고 2차 가해를 방치했다면, 이는 회사의 독자적인 불법행위가 되어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까지 물을 수 있다.
흩어진 증거, '가해자별 책임'과 '시간순'으로 재구성해야
노동부 인정, 산재 승인, 형사 고소, 민사 소송 준비 등 여러 절차가 얽힌 복잡한 사건일수록 증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전략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변호사들은 흩어진 증거를 법적 책임에 맞춰 재구성하는 작업이 승패를 가른다고 입을 모은다.
더신사 법무법인 정준현 변호사는 "실무에서는 신고 경위, 조사 과정, 인사조치, 병가나 휴직 이후의 불이익, 카톡과 녹취, 진료기록을 시간순으로 정리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형사사건은 행위자별로 사실관계를 분리해 고소 취지를 정리하고, 민사는 위자료와 치료비, 휴업손해를 별도로 구성하는 방식이 맞다"고 설명했다.
법무법인 한설 조민성 변호사 역시 "결국 이 사건의 방향을 가르는 것은 흩어진 증거를 형사 책임과 회사의 배상책임이라는 두 축으로 재정렬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프로필 사진을 이용한 2차 가해나 집단 따돌림 등 추가로 발생한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별도의 증거 목록을 만들어 추가 고소하는 방안도 적극 고려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