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글날에 생각하는 법률용어와 민주주의
[기고] 한글날에 생각하는 법률용어와 민주주의
세종이 생각했던 ‘익히기 쉽고 쓰기 편한 문자’의 이상(理想)
법률용어에서만큼은 아직 갈 길 멀어
![[기고] 한글날에 생각하는 법률용어와 민주주의 기사 관련이미지](https://d2ilb6aov9ebgm.cloudfront.net/2019-10-09T15.21.45.899_865.jpg?q=80&s=832x832)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은 특정 계급이 독점하던 문자 생활을 일반 대중들도 누릴 수 있게 했다. /셔터스톡
편집자주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목표로 한글이 창제된 지 벌써 570년이 넘었다. 하지만 법률용어는 대학교육을 마친 사람조차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런 문제 의식에서 지난해 국어학회에서 '올해의 국어학 신진학도'(일석장려상 수상)로 선정된 언어학자 허인영(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의 기고를 싣는다.
한글날이 573주년을 맞았다. 한글날은 《훈민정음》이라는 책의 반포를 기념하는 날이다. (사실은 《훈민정음》의 원고가 완성된 날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세종 자신이 쓴 《훈민정음》의 어제 서문에 따르면 백성들이 문자를 익히기 쉽고 쓰기 편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당시까지는 특정 계급이 독점하던 문자 생활을 일반 대중들도 누릴 수 있게 한 것이다.
흔히 한글 창제를 세종의 애민(愛民) 정신과 관련 짓지만, 오늘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문에서 알 수 있듯이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나아가 사회 구성원들의 의사를 차별 없이 보편적으로 반영하는 것을 민주적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글의 창제와 보급은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국민의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선구적으로 실현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자를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된 오늘날에 와서는 세종이 생각했던 ‘익히기 쉽고 쓰기 편한 문자’의 이상이 거의 달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법률용어에서만큼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려야 할 국민들의 ‘알 권리’가 제대로 충족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국민들이 법을 멀게 느끼고, 딱딱한 법률용어를 어려워하는 것이 사실이다. 왜 법률용어를 비롯한 전문용어는 접근하기 어려운 한자어로 된 것이 많을까?
근대적인 학문은 대체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주로 일본을 거쳐서 수입되었다. 근대 학문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번역은 필수적이다. 일본인들이 그 과정에서 새로운 개념을 표현할 번역어를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는 다행히도 한자를 매개로 하여 이미 일본에서 만들어진 번역어를 손쉽게 가져다 쓸 수 있었다. 불행히도 그 때문에 각종 전문용어는 한자로 가득하게 되었고, 대중들은 전문용어를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다.
법률 분야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려운 용어, 일본식 표기, 복잡한 문장 구조로 가득한 법조문과 각종 서식은 대중들이 법을 어렵게 느끼고 멀어지게 하는 이유로 작용한다. 예컨대 ‘해태(懈怠)하다’(게을리하다), ‘수불(受拂)’(출납), ‘계리(計理)’(회계처리)와 같은 단어는 한번 봐서는 무슨 뜻인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이런 해프닝도 있다. 2003년, 태풍 ‘매미’로 인한 부산항 크레인 붕괴사고와 관련된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있었다. 부산지법은 원고에게 피고가 ‘각자’ 일정 금액을 지급하라고 판결하였다. 이 ‘각자’의 의미를 ‘저마다’로 받아들인 소송 당사자들은 당황하였으나, 법원에서는 ‘합동하여’, ‘연대하여’라는 뜻으로 사용했다고 밝혔다. 법률용어의 문제는 국민들이 공공 정보에 접근하기 어렵게 만들고 나아가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법제처에서는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이 사업에서는 입법과 법령 정비 과정에서 어려운 용어가 사용되는 것을 차단하고 쉽고 올바른 표현을 사용하여 국민 모두가 법령을 쉽게 읽고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 결과, 위에서 예로 든 몇몇 단어를 비롯한 어려운 용어, 일본식 표현, 차별적·권위적 용어가 개선되는 성과가 있었다. 이는 법령을 만드는 입장에서 법률용어를 민주적으로 개선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렇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최근 한 연구에서 48개 현행 법령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매우 어렵다’가 43.3%, ‘조금 어렵다’가 32.4%로 어렵다는 의견이 75.7%를 차지하였다(2018년 ‘교육부-문화부 소관 어려운 법령용어 정비를 위한 연구’).

교육부-문화부 소관 어려운 법령용어 정비를 위한 연구(2018년). /법제처
전문가와 대중 사이에 있는 언론 보도에서도 이런 문제는 마찬가지다. 법률적인 정확성을 고려하여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하면 대중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문장이 되어 버리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쓰려고 하면 법률적으로는 정확하지 않은 문장이 되기 때문이다. 특정한 법률적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는 쉽게 풀어서 쓰기 어려우므로 짤막하게 해설을 첨부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만하다. 최근 대중의 입장에서 어려운 법률용어를 쉽게 풀어서 전달하는 기사도 눈에 띄는데, 앞으로 이런 기사를 더 많이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과거와 달리 현대에는 일상생활에서 법과 마주칠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구나 인권을 보장받고, 남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법률정보가 이해하기 쉬운 형식으로 공유되어야 한다. 정보를 독점하지 않고 공유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시작이며, 건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회 구성원들이 양질의 법률정보를 평등하게 접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이 한글날을 맞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법률정보를 접하는 사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