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문혁 교수의 '모르면 후회할 법 이야기'(22)] 남에게 일을 맡기는 계약의 모습들
[호문혁 교수의 '모르면 후회할 법 이야기'(22)] 남에게 일을 맡기는 계약의 모습들
위임·도급·여행·고용
![[호문혁 교수의 '모르면 후회할 법 이야기'(22)] 남에게 일을 맡기는 계약의 모습들 기사 관련이미지](https://d2ilb6aov9ebgm.cloudfront.net/1623031698992506.jpg?q=80&s=832x832)
남의 일을 맡아서 하기로 한 계약에는 위임, 도급, 여행, 고용 등이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0여 년 전 미국에서 다리미를 바꾸러 왔다 갔다 할 때 머물던 아파트에서 또 다른 희한한 경험을 했다. 방에서 사무용 의자에 앉아 책을 보려는데, 의자가 슬금슬금 한 쪽으로 흘러갔다. '의자에 귀신이 붙었나?' 했는데, 알고 보니 방바닥이 기울어져 있었다. 건물을 이렇게 짓기로 계약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여튼 건물 전체가 피사의 사탑이 되지 않은 것만도 무척 다행이었다.
이춘풍이 허생원의 일을 맡아서 하기로 한 계약에는 위임, 도급, 여행, 고용 등이 있다. 그중에서 허생원이 이춘풍에게 사무의 처리를 위탁하는 계약을 위임(委任)이라고 한다. 허생원을 위임인, 이춘풍을 수임인이라고 한다. 위임계약의 핵심은 두 당사자의 신뢰관계이어서, 수임인 이춘풍이 위임인 허생원의 사무를 남의 일을 맡아 하는 일반인 수준의 주의(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를 기울여 성실하게 처리할 의무를 진다. 그러나 남의 신뢰를 받아 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보수를 받지 않는다는 고상한 법 원칙에 따라 보수 지급을 계약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면 수임인은 보수를 받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요새 세상에 남의 일을 무보수로 해주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위임과 비슷한 모습으로는 대리관계가 있다. 이는 본인과 대리인의 계약이 아니라 본인의 일방적인 의사표시로 대리할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지만, 위임계약을 그 바탕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흔히 변호사에게 소송을 위임하는 것을 '변호사를 산다'고 하는데, 잘못된 표현이다.
이춘풍이 어떤 일을 완성하기로 하고, 허생원은 이춘풍에게 보수를 지급하기로 하는 계약을 도급(都給)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예가 이춘풍이 건물을 지어서 허생원에게 인도하는 일이다. 일을 시킨 허생원을 도급인, 일을 맡아서 완성하기로 한 이춘풍을 수급인이라고 한다.
민법은 부동산 공사의 수급인이 보수를 제대로 받을 수 있도록 그 부동산에 저당권설정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그와 반대로 완성된 목적물이나 완성 전이라도 이미 진행된 부분에 흠결(하자)이 있으면 수급인에게 하자를 보수할 담보책임을 부담시켜 도급인을 보호한다.
도급계약의 목적은 '일의 완성'에 있으므로 일을 완성하기 전에는 도급인이 보수를 지급할 의무가 없다. 그러나 수급인이 일을 하다가 중단하여 계약이 해제된 경우에는 완성된 부분의 비율만큼의 보수를 청구할 수 있다.
수급인 이춘풍이 맡은 일을 제3자 김선달에게 다시 도급을 주는 수가 많다. 이를 하도급이라고 하는데, 건설공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 경우에 김선달을 하수급인이라고 한다.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언론에서도 청부·원청·하청·하청업자 등의 일본 용어를 마구 쓰는데, 이는 삼갈 일이다.
여행계약은 여행사 등 여행주최자가 여행자에게 여행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하고, 여행자는 여행주최자에게 대금을 지급하기로 하는 계약이다. 여행서비스에는 여행자를 운송하고, 숙식을 제공하고, 관광을 시켜주기로 하는 등의 여러 서비스가 결합되는 특색이 있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는 여행자가 언제든 상대방에게 생긴 손해를 배상하고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 여행을 시작한 뒤에는 부득이한 사정이 생겼으면 각 당사자는 계약의 효력을 장래에 향하여 소멸시키는 해지를 할 수 있으나, 과실 있는 당사자는 상대방의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이처럼 여행 중에 계약이 사라지면 여행자가 남의 나라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수가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 민법은 여행주최자의 귀환송환의무는 소멸하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여행에 흠결(하자)이 있으면 여행주최자는 담보책임을 진다. 즉 여행자는 하자의 시정이나 대금의 감액이나 손해배상 등을 청구할 수 있고, 정상적인 여행을 기대할 수 없는 경우에는 계약을 해지할 수도 있다.
그 밖에 사용자와 노무자의 고용계약도 있으나, 4인 이하 소규모 사업장이나 가사노무자 등의 고용관계에만 적용되고 그 이외의 고용에는 근로기준법이 적용된다.
남과 일을 맡고 맡기는 관계는 삐끗하면 악화될 수가 있으니 피사의 사탑을 짓지 않도록 성심성의를 다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