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헌법의 달에 생각하는 인본주의
7월, 헌법의 달에 생각하는 인본주의

'사형제도는 생명권의 본질을 침해하므로 헌법에 위반된다'고 하는 사형폐지론이 이상적으론 최선책이지만, 인류의 기나긴 역사와 실제 범죄현실 속에서 사형제도의 절대적 위헌론을 선뜻 지지하기는 어렵다고 정진섭 변호사는 말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나의 인생 2.5모작 일곱 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7월은 헌법의 달입니다. 어린 코흘리개 시절 저는 7월을 무척 기다렸습니다. 지루한 1학기를 마칠 무렵, 국경일인 제헌절을 쉬고 나서, 긴 여름방학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헌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고, 인본주의(人本主義)라는 거창한 용어는 알지도 못했습니다. 제헌절이란 우리의 생활과 별 관계가 없이, 그저 어른들이 정해놓은, 반가운 공휴일로 생각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 법대생이 되고 나서 제헌절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헌법 교수님은 우리 헌법의 최고 이념은 '인간의 존엄성'에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딴판이었고, 당시 우리들은 유신헌법 철폐를 외치면서 최루탄 연기를 맞으며 교문을 뛰쳐나갔습니다. 결국 우리 국민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고, 헌법재판소가 창설되면서, 비로소 우리 헌법은 모든 법률해석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시민 생활의 현실 문제에 직접 관여하는 생활헌법으로 정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절 법학도로, 사법연수생으로, 현직 검사로 성장하면서, 저는 점점 대한민국 헌법이 자랑스러워졌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천명한 헌법정신이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88서울올림픽과 2002한일월드컵 대회를 거치면서, 우리나라가 번영을 누릴 수 있는 원동력은 자유와 인권이 살아 숨 쉬는 인본주의에 있다고 확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헌법정신을 배우고, 실천하는 공익의 대표자가 되었다는 긍지를 가지고, 신나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직업적 딜레마에 빠져 힘겨웠습니다. 복잡한 형사사건 속에서 진실을 다 밝혀내지 못하거나, 인간의 존엄성이 이념가치나 물질가치보다 경시되는 상황에 마주칠 때는 괴롭기도 했습니다. 나의 판단과 결정이 구체적 정의(正義)에 부합하는 걸까 의문이 들고, 그래서 능력의 한계나 좌절감을 느낀 적도 있습니다. 심지어 영원히 풀 수 없는 숙명적 과제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 적도 있습니다. 예컨대 흉악범에 대한 사형집행 문제가 그랬습니다.
법무부 검찰국(검찰제2과, 지금의 형사기획과) 평검사 재직 당시, 누구나 근무하고 싶어 하는 곳이라 보람찬 추억이 많았지만, 한편으론 잊어버리고 싶은 일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형수 관리 업무였습니다. 당시 전국 교도소에 50여명의 사형수가 있었지만, 실제 사형집행은 하지 않던 시절입니다. 독실한 불교신자이던 황산덕 장관님 이래 10년 넘게 사형집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형집행 대상자를 선정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흉악범과 반인륜 패륜범죄가 빈발하는 터라 사회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극약처방이었습니다.
담당 실무자로서 솔직한 심경은 무조건 반대였습니다. 그런데 일단 대상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범죄사실과 행장을 살펴보니, 선뜻 반대의견을 고집할 수가 없었습니다. 워낙 중요한 문제라서 몇 날 며칠 치열한 토론과 검토를 거쳐서, 최종적으로 7명을 집행대상자로 선정했습니다. 정말로 피하고 싶었던 일이지만, 그들은 결국 교수형으로 생을 마쳤습니다.
이후에도 법무부는 1997년 김영삼 정부시절까지 몇 차례 더 사형집행을 단행했습니다. 그때 저는 일선검찰로 자리를 옮겨서 지적재산권과 컴퓨터범죄 전담검사로 활동하면서, 사형집행 업무의 기억을 잊고 지냈습니다. 그래도 내가 집행 대상자를 선정한 것도 아니고, 집행현장에 입회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이 확정된 사건이라, 법무부가 선고 책임을 지는 건 아닌데도, 한때 대상자 선정절차를 담당했다는 경험만으로, 그때마다 지난 법무부 근무시절 중압감이 떠올라 스트레스를 받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다행히 김대중 정부 이후 우리나라는 더 이상 사형집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흉악범이나 패륜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사형집행 여론이 일어났지만, 저는 점점 사형폐지론을 지지하는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몇 차례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20년 넘게 사형집행이 없었던 덕택에, 우리나라는 UN에서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형사정책 분야에서 문명국가의 위상을 뚜렷하게 확보한 것입니다.
어느덧 25년 검찰생활을 마치고, 모교 법대교수로 부임한 지 얼마 뒤에, 형법교수들 사이에 사형제도 폐지 입법을 위한 설문조사가 배달되었습니다. 그 설문 항목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저는 사형제도 폐지입법에 찬성하지 못하고, 실질적 사형폐지국가로 만족하자는 입장을 선택했습니다. 어정쩡한 의견이지만, 직업상 체험한 실무담당자의 정신적 압박감을 고려해서 솔직하게 답변한 의견이었습니다.
'사형제도는 생명권의 본질을 침해하므로 헌법에 위반된다'고 하는 사형폐지론이 이상적으론 최선책이지만, 인류의 기나긴 역사와 실제 범죄현실 속에서 사형제도의 절대적 위헌론을 선뜻 지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엄격한 증거법칙과 법관의 객관적 양심에 따른 사형선고 가능성을 열어놓고, 사형집행만 사실상 보류하는 절충안이 사회 공동체를 지키는 차선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제헌절 74주년을 앞두고, 헌법재판소에서 7월 14일 사형제도의 위헌여부에 관한 공개변론이 열렸고, 조만간 헌재 역사상 3번째 위헌여부 판단이 내려질 예정입니다. 앞서 1996년에는 7대2, 2010년에는 5대4로 합헌론이 다수의견이었지만, 이번에는 바뀔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저도 그 귀추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3년 전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지만, 아직도 태아의 생명권 보호를 위한 대체입법이 이행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사형제도가 갑자기 폐지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사형의 대체형벌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자리 잡으려면 더 많은 형사정책적 노력과 장기간의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기간 동안 국민들의 치안질서에 대한 불안감은 커질 수밖에 없고, 거꾸로 사형지지 여론이 높아질까 염려되기도 합니다. 어떤 결론을 내리든 헌법재판관들의 어깨는 무거울 것입니다. 부디 국민 모두가 안심하고, 수긍할 수 있는 판단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어느덧 삶의 전성기를 지나, 인생 제3막에 접어든 저에게, 인본주의적 가치관의 이해는 매우 중요한 숙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누구나 육신과의 동일시로 인한 '지금의 나'만을 자기자신으로 여기는 인간 본질에 대한 오해와 이해관계의 갈등 속에서 과연 '인간의 존엄'이라는 실체가 있기는 한 걸까? 만일 인간의 존엄이 단순히 생명권을 지켜주는 것을 의미한다면, 범죄피해자의 빼앗긴 목숨과 사형수의 목숨 가운데 무엇이 더 존중되어야 할까? 이것은 마치 낙태죄 논란에서 태아의 생명권과 엄마의 건강권은 양립이 불가능한가 하는 의문과 비슷합니다. 정말 딜레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문득 여배우 전도연이 주연한 영화 '밀양'의 스토리가 떠오릅니다. 아들을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러 면회 갔다가, 벌써 하느님한테 용서받았다고 고백하는 죄수의 말을 듣고 절규하는 엄마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길은 없지만, 영화를 보고 함께 연민하며 눈물 흘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은 카타르시스를 얻을 수 있고, 정신적 치유의 기회도 가질 수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어린 학생들의 생명을 버리고 먼저 살겠다고 탈출한 선장의 비겁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은 분노했습니다. 반면에 불타는 화재현장에 뛰어들어 인명을 구조하다가 대신 목숨을 잃은 소방관의 용감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은 감동했습니다. 이것은 일견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진실은 분명합니다. 육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보다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이 더 소중하고, 더 인간답고, 더 가치가 있는 선택이라는 진실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누구에게나 소중한 '인간의 존엄'을 천명하고 있는 우리 헌법은 인본주의의 기준점이자 출발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은 '인본주의'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헌법의 달, 7월을 맞이하여 인본주의에 관한 칼럼을 쓰다 보니, 주로 인간사회의 어두운 측면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사실 우리 삶 가운데는 밝은 측면이 훨씬 많고, 그게 더 본질에 가까운 편입니다.
평소 저는 인간(人間)이라는 단어에 매력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을 허공, 즉 '사람(人) 사이(間)'에서 찾으려 하는 조상의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의 존재가치를 육신과의 동일시로 인한 '지금의 나'에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에 두는 것이야말로, 현대적인 언어로 표현하면 바로 '사랑과 자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성의 궁극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류의 성현들이 공통적으로 전해 주는 교훈입니다. 사랑으로 모든 것이 '하나'임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 삶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담겨 있으며, 거기에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습니다. 사랑은 우주 만물에 편재해 있으며, 아무리 미미한 사물에도 담겨 있습니다. 이런 보편적 진실-자비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 존엄'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18세 약관의 피아니스트 임윤찬 군이 세계적인 콩쿠르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며칠 전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한 허준이 교수가 수학계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을 수상했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소위 '국뽕'에 취할 만큼 반가운 소식입니다. 끝으로 요즘 제가 자주 보는 유튜브 채널 하나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라오스 오지마을 한국인' 유튜브 동영상입니다. 이역만리에서 봉사 활동하는 한국 청년의 활약상도 대단하지만, 그보다는 라오스 소년소녀들의 천진난만한 표정이 마치 1960년대 초반 우리 세대의 어릴 적 모습과 흡사해서, 틈날 때마다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이런 밝은 소식들의 공통점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이 마음껏 발휘되고, 조상 전래의 홍익인간 정신이 지구촌 곳곳에 전파되고 있는 증거라서 무척 반갑습니다. 어느 특정한 지역이나 계층에만 '인간의 존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곳이라면 항상 충만해 있다는 증거라서 정말 다행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