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기 테러에 녹아내린 작품, "자연재해"라는 뻔뻔한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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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기 테러에 녹아내린 작품, "자연재해"라는 뻔뻔한 갤러리

2025. 09. 17 13:31 작성
조연지 기자의 썸네일 이미지
yj.jo@lawt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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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문 두드린 작가, 계약서 없어도 배상 가능할까…예술계 불공정 관행에 경종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개인전을 코앞에 둔 미술작가 A씨는 악몽 같은 현실에 주저앉았다. 반년간 애지중지 키운 소중한 작품들이 축축한 전시장 공기 속에 형체도 없이 녹아내린 것. 피눈물을 흘리는 작가에게 갤러리 측이 "자연재해"라며 책임을 돌렸다. 예술가의 꿈이 악몽으로 변한 순간이었다.


계약서 없어도 '묵시적 계약' 성립

A씨를 더 불안하게 만든 것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않았다는 점이다. 앞서 갤러리 측은 "프린트를 못 했다"는 등의 이유를 대며 번번이 서명을 미뤄왔다. 이처럼 구두로 모든 것이 진행된 상황에서도 갤러리에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법률 전문가들은 계약서가 없다는 사실이 갤러리의 책임을 면제해주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민법 제105조에 따라, 계약은 서면뿐 아니라 구두로도 성립한다.


갤러리가 전시를 제안하고 작가가 이를 수락해 작품을 설치한 행위 자체가 이미 '전시 계약'이 성립했다는 명백한 증거다. 카카오톡 대화, 녹취 등도 묵시적 계약을 입증할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자연재해' 주장은 법적 불가항력에 해당하지 않아

갤러리 측이 내세운 '자연재해' 주장 역시 법적으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민법 제390조는 채무자가 고의나 과실로 채무를 이행하지 못했을 때 손해배상 책임을 지도록 규정한다.


여기서 갤러리는 작품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전시할 '관리의무'를 지게 된다. 이는 단순히 작품을 놓아두는 것을 넘어, 적정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여 작품이 손상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는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선관주의의무)'에 해당한다.


여름철 높은 습도는 예측 불가능한 '천재지변'으로 보기 어렵다.


법률에서 인정하는 '불가항력'은 사회 통념상 미리 예상하거나 막을 수 없는 수준의 재해를 의미한다. 미술품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갤러리는 습도 상승을 충분히 예견하고, 제습 시설을 갖추는 등 작품 보존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할 기본적인 책임이 있다. A씨가 확보한 습도계 사진, 제습기 가동 후에도 높았던 습도 기록 등은 갤러리의 관리 소홀과 과실을 입증하는 핵심 증거가 된다.


손해배상액 산정, 작품 가치 입증이 관건

이제 관건은 손해배상액을 어떻게 산정하느냐다. 법원은 통상 작품 수리가 불가능할 경우 훼손 당시의 '시가(시장 가치)'를 손해액으로 인정한다.


예술 작품은 객관적인 가치를 측정하기 어려워 '감정평가'를 통해 가치를 산정하는 과정이 필요할 수 있다.


A씨는 손상 전후 사진, 대화 녹음 등 증거와 함께 자신의 활동 이력, 기존 작품 판매 사례, 전시 경력, 수상 이력 등을 통해 작품의 시장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작품 제작에 들어간 재료비가 아니라, 작가의 시간과 노력이 담긴 창작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과정이다.


예술계의 고질적인 '신뢰' 관계, 표준계약서로 보호해야

반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작가의 상처는 금전적 보상만으로 치유되기 어렵다. 이번 사건은 예술가의 꿈을 담보로 한 '신뢰' 관계가 얼마나 허술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번 일을 계기로, 예술계의 고질적인 구두 계약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제공하는 '미술 분야 표준계약서'에는 작품 운송, 보험, 보관, 손상 시 배상 등 구체적인 조항들이 명시되어 있어 창작자를 보호하는 최소한의 장치가 될 수 있다.


법적 분쟁을 예방하고 예술가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이러한 표준 계약의 정착이 시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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