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아동학대, '시효'의 벽에 막힌 눈물
30년 전 아동학대, '시효'의 벽에 막힌 눈물
피해자의 목소리로 재구성한 법적 공백의 현실. 시효 제도의 존재 이유와 구체적 대안까지 심층 분석한다.

아직도 30년전 계모의 끔찍한 성적 학대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A씨. 그러나 ‘공소시효’와 ‘소멸시효’라는 두 개의 거대한 벽이 법정으로 향하는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셔터스톡
“제 고통엔 시효가 없는데”...30년 전 학대, 법의 시계는 멈췄다
“매일 밤 그날의 악몽을 꾸는데, 왜 제 고통에는 시효가 없는데 법에는 시효가 있는 겁니까?”
서른 해 전 계모에게 당한 끔찍한 학대의 기억으로 여전히 정신과를 오가는 40대 남성 A씨. 그의 절규처럼 고통은 현재진행형이지만, 법의 시계는 이미 멈췄다. 형사 처벌의 ‘공소시효’와 민사 배상의 ‘소멸시효’라는 두 개의 거대한 벽이 30년 만에 낸 그의 용기를 가로막았다.
“벌을 줄 수 없다니요?”…30년 만의 용기, 공소시효에 막히다
A씨(1982년생)의 삶은 아홉 살이던 1991년, 계모가 집에 들어오면서 송두리째 바뀌었다. 계모는 1995년까지 A씨를 발가벗겨 성기를 만지고 자위행위를 강요하는 등 끔찍한 성적 학대를 일삼았다. 반항하면 각목으로 때리는 신체적 폭력도 동반됐다. A씨는 “그 사람은 제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렸는데, 법은 시간이 지났으니 어쩔 수 없다고만 한다”며 울분을 토했다.
하지만 그의 고소는 ‘공소시효’라는 시간의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공소시효란 범죄를 처벌할 수 있는 일종의 ‘유통기한’입니다. 이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증거가 사라져 공정한 재판이 어려워지는 점, 그리고 범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약해지고 법적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제도다. A씨의 피해가 발생한 1990년대 당시 강제추행죄의 공소시효는 7년. 2000년대 초반 이미 처벌의 기회는 사라져버린 셈이다.
물론 지금은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의 공소시효가 폐지되거나, 피해자가 성인이 된 날부터 다시 계산하는 특례가 생겼다. 하지만 법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이미 시효가 완성된 과거의 범죄를 되살려 처벌할 수 없다는 ‘소급적용 불가 원칙’ 때문이다. A씨의 계모를 형사 법정에 세울 길은 사실상 막혔다.
“돈으로도 못 받을 상처”…손해배상 청구권마저 시간 속에 사라져
형사 처벌이 좌절된 A씨는 정신적 고통에 대한 민사상 손해배상이라도 받길 원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소멸시효’라는 또 다른 시간의 장벽이 있었다.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권은 ‘피해 사실을 안 날로부터 3년’, ‘불법행위가 있었던 날로부터 10년’이라는 모래시계가 다 떨어지면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제 시간은 30년 전 그날에 멈춰 있는데, 법은 10년이면 모든 게 끝난다고 합니다.” A씨의 말처럼, 그의 심리적 시간과 법의 시간은 너무도 달랐다.
최근 법원이 아동 성학대 피해자가 트라우마로 권리 행사를 제때 못 한 사정을 참작해 시효 계산을 유연하게 해석한 사례가 있긴 하다. 이재용 변호사(JY법률사무소)는 “지속적인 정신과 치료 사실 등을 입증해 피해가 계속되고 있음을 주장해볼 수는 있다”고 조언했지만, 30년이라는 긴 세월 탓에 “승소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법의 시간과 피해자의 시간, 그 아픈 간극 앞에서
법적 구제가 모두 막힌 A씨에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다. 사과를 요구하려다 되레 명예훼손으로 역공당할 수 있다는 변호사의 경고는, 진실을 밝히려는 용기가 오히려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는 잔인한 현실을 보여준다. A씨의 좌절은 법의 시간과 피해자의 시간이 충돌하는 지점을 선명히 드러낸다.
범죄를 처벌할 수 있는 '공소시효', 손해를 배상받을 권리인 '소멸시효', 그리고 이미 완성된 시효를 되돌릴 수 없다는 '소급적용 불가 원칙'까지. 법적 안정을 위해 쌓아 올린 이 시간의 벽들은 30년 만에 용기를 낸 한 피해자에게는 넘을 수 없는 절망의 벽이 됐다. 피해자의 고통에는 시효가 없지만, 법의 시계는 이미 멈췄습니다. 잊히지 않는 고통과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사이에서, 우리 사회는 이 아픈 간극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