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유죄 판결이 결정타…성폭행범의 "합의했다" 주장, 민사재판서도 안 통했다
형사 유죄 판결이 결정타…성폭행범의 "합의했다" 주장, 민사재판서도 안 통했다
“합의된 관계” 주장한 가해자
법원, “확정된 형사 판결 뒤집을 특별한 사정 없다” 일축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미국 유학 시절 만나 동거까지 했던 연인. 그러나 그 관계의 끝은 성폭력 범죄였고, 가해자는 결국 법의 심판을 받았다. 형사 재판에서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이 확정된 남성에게, 법원이 민사 소송에서도 그 책임을 물어 피해자에게 3,00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번 판결의 핵심은 피고인이 "합의된 관계였다"고 항변했지만, 법원이 이를 단칼에 자른 근거가 바로 확정된 형사 판결이었다는 점이다.
사랑에서 악몽으로…4년간의 법정 다툼
원고 A씨와 피고 B씨는 2013년 미국 텍사스의 한 대학에서 만나 연인으로 발전했고, 동거까지 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2017년 파국을 맞았고, B씨가 군 복무를 위해 귀국한 뒤 A씨는 '국방 헬프콜'을 통해 B씨를 강간, 폭행, 불법 촬영 등의 혐의로 신고했다.
길고 긴 형사 재판이 시작됐다. B씨는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일부 혐의가 무죄로 판단되면서 징역 2년 6개월로 감형됐다. 이 판결은 2022년 9월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며 최종 확정됐다.
형사 재판이 진행 중이던 2020년, A씨는 B씨의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배상하라며 1억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형사 처벌과는 별개로, 민사상 손해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함이었다.
민사 재판을 지배하는 ‘유력한 증거’가 된 형사 판결
민사 재판에서 B씨는 "모든 행위는 합의하에 이루어졌다"며 자신의 불법행위 자체를 부인했다. 형사 재판에서의 주장과 같았다. 그러나 민사 법원의 판단은 단호했다. 재판부는 B씨의 주장을 일축하며, 그 결정적인 근거로 확정된 형사 판결을 제시했다.
법원은 "동일한 사실관계에 관하여 이미 확정된 형사판결이 유죄로 인정한 사실은 유력한 증거자료가 된다"는 대법원 판례를 인용했다. 이는 민사 재판이 형사 재판의 결론에 무조건 구속되는 것은 아니지만, 형사 재판의 사실 판단을 뒤집을 만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다.
왜 그럴까? 형사 재판은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라는 매우 엄격한 증명 책임을 요구한다. 즉, 형사 재판에서 유죄가 나왔다는 것은 그 사실관계가 매우 높은 수준으로 입증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민사 재판에서 같은 내용을 다시 처음부터 따지는 것은 사법 자원의 낭비이며, 이미 고통받은 피해자에게 가혹한 입증 책임을 또다시 지우는 셈이 된다.
이 사건에서 재판부는 B씨가 형사 재판의 결과를 뒤집을 만한 그 어떤 '특별한 사정'도 제시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1심부터 대법원까지 이어진 치열한 형사 재판 과정에서 B씨의 "합의" 주장은 이미 여러 차례 배척당했기 때문이다. 결국, 확정된 형사 판결은 B씨의 불법행위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하고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했다.
소멸시효 주장에 대해서도 '형사 판결'이 기준
B씨는 "불법행위가 있었던 날로부터 3년이 지나 소송을 제기했으니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주장도 펼쳤다. 하지만 법원은 이 주장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시작되는 시점, 즉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을 "가해 행위가 불법행위임을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인식한 날"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는 B씨가 형사 재판 내내 범행을 부인하며 다퉜던 점 등을 고려할 때, A씨가 B씨의 행위가 명백한 불법행위임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된 시점은 형사 1심 유죄 판결이 선고된 2021년 11월 11일로 보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A씨의 민사 소송은 그보다 앞선 2020년에 제기됐으므로 소멸시효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결국 법원은 B씨의 모든 주장을 기각하고 "피고는 원고에게 위자료 3,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